■ 2019년 새해를 여는 여성농업인 -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 홍쌍리 명인

2019년 희망의 새해를 맞았다. 보람과 성취를 앞당길 다짐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보람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다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운산을 개간해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명소로 만든 청매실농원 홍쌍리 매실명인을 만나 그 비결을 들어봤다. 45년간 가파른 매실농원을 개간하고 고된 농사와 험한 삶을 헤쳐 온 명인의 얘기는 새해 새 삶을 다짐하는 귀중한 메시지가 될 듯하다.

 악산 개간해 매화천국으로 탈바꿈시켜
 연간 200만 관광객 몰리는 명소로 가꿔
“농업․농촌은 청년․여성에게 블루오션” 강조

밤나무를 베고 매화나무 심는다고!
홍쌍리 명인은 1943년 정월초사흘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복했지만 남아선호사상이 뼛속까지 뿌리박혀있는 아버지는 오빠만 대학공부를 시키고 그녀는 초등학교만 보냈다. 당찬 여자아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시대, 아버지는 자신을 닮아 영특하고 고집이 센 16살 쌍리의 기를 꺾으려고 부산 국제시장에 있는 친척이 운영하는 상점으로 그녀를 보냈다. 그녀는 이곳에서 훗날 시아버지가 될 김오천 씨를 만났고 1965년 광양 백운산으로 시집와 농원을 개간해 안주인이 됐다. 먼저 농원을 개간했던 얘기부터 들었다.

“23살에 시집와 이듬해부터 농사를 시작했는데, 농사를 지으려고 산에 올라보니 죽었으면 죽었지 못 하겠더군요. 하지만 그대로 물러날 제가 아니었죠. 당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동네를 드나들지 못했는데, 그래서 동네주민들과 함께 지게를 지며 길을 냈어요. 시아버지께서 농림부장관한테 받은 리어카와 보급된 경운기로 길을 만들고 밤나무를 베고 매실나무를 심었어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매실이 맺히고 버스가 다니면서 이제는 1년에 200만 명이 넘게 찾는 청매실농원이 됐지요.”
돈이 되는 밤나무를 베고 왜 실속 없는 매실을 심었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병으로 몸져누워있는데다가 농사일도 힘들어 시아버지께 친정으로 보내달라고 눈물로 애원했어요. 시아버님은 제가 없이는 아들을 살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웬만한 일이면 다 들어줬어요. 산에 꽃이 피고 섬진강의 새벽안개가 솜이불을 덮어 놓은 것처럼 피어오르는 풍광에 매료돼 매실나무를 심자고 시아버지를 졸랐어요. 그리곤 매실이 사람 뱃속을 청소해내는 좋은 건강먹거리로서 언젠가는 소득을 내게 될 거라며 설득했어요.

당시 동네 사람들은 주로 토종밤나무를 재배했는데, 시아버지는 개량밤을 심었어요. 개량밤은 밤 한 가마니에 쌀 두가마니 값을 받을 만큼 소득이 좋았죠. 그런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자고 했을 때 시아버님 마음은 오죽했겠어요.”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잡고 “매화꽃이 밥을 먹여 주냐!”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홍쌍리 명인도 시아버지 바짓가랑이를 움켜잡고 함께 울었다. 그러면서 “농사 대를 잘 이을게요.”라며 위로를 드렸다.
그 후 홍쌍리 명인은 매화나무를 키우면서 시아버지의 상심을 달래려고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위로했다고 한다. 시아버지 손발을 씻겨드리고 저녁마다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홍쌍리 명인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애물로 바친 한 여인의 가슴앓이
가슴에 꾹꾹 누질러 담아 삶의 아픔을 흙에 꾹꾹 묻어 놓고
삽으로 꾹꾹 밟아 한 여인의 가슴에 심은 매화나무야
니들이 있어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제.
-홍쌍리 작사·작곡 ‘삶의 아픔’-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에 도취돼 자연스레 글을 쓰고 가락을 읊으며 흥얼거리다 보니 노래가 됐다고 한다.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가 11곳이나 됩니다. 이 노래를 가지고 KBS 열린음악회에 두 번, 명사음악회에도 나갔고,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가곡의 밤’에도 출연했어요. 다들 남이 지은 노래를 불렀는데, 나만 내가 직접 만든 노래를 불렀어요. 그 후엔 내가 만든 노래만 부르지 남이 만든 것은 잘 부르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녀는 요즘 농협중앙회장의 권유로 시집 발간을 앞두고 있다. 또 광양시에서 예산을 대고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동화나 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해도 80이 넘으면 해볼 생각으로 지금은 주저하고 있다고.

관광객들 꽃으로 힐링하는 것에 보람
청매실농원의 매화는 다채롭다. 백매, 홍매, 청매에 노란 매화와 보라색 매화도 구해 심어 5색(五色) 5미(五美)의 구색을 갖췄다.
남들이 다 쉬는 비 오는 날에도 명인은 모종삽을 들고 들과 산에서 예쁜 야생화를 캐다가 집 가까이에 심었다. 꽃이 피고 향기가 번져 나가자 소문을 듣고 영국과 프랑스 언론인이 찾아와 “여긴 농원이 아니라 공원이다.”라는 감탄의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농원을 가꿨더니 영화나 드라마를 찍게 해달라는 요청도 쇄도했다.

‘취화선’, ‘다모’, ‘흑수선’, ‘봄의 왈츠’ 등을 청매실농원에서 촬영했다. ‘천년학’을 찍을 때 오픈세트로 지은 초가집은 철거하지 않고 색다른 볼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홍쌍리 명인은 꽃이 예쁜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의 안식을 얻어 가는 모습에 더 큰 감동과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명인에겐 더 큰 고난과 시련이 들이닥쳤다.
시아버지는 1967년 시숙과 광산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해 6년 만에 손을 털었다. 이때 45만 평의 땅을 빚쟁이한테 넘기고도 2700만 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지금으로 치면 27억 원에 달하는 큰돈이다. 매달 45% 고리에 원금을 갚느라 아이들에게 밥을 제대로 못 먹여 밥그릇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고 한다.

또 거름이 없어 동네 변소를 펐는데, 똥짐을 질 아이가 친구들은 딱지와 구슬치기를 하며 노는데, 똥짐 지는 게 창피했던 아들은 “엄마는 원수야! 보기 싫어”라며 내지르는 말에 엄마로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장갑도 안 낀 손에 똥이 묻은 것도 모르고 아이의 눈물을 닦다보니 아이 얼굴에 똥이 묻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명인은 정말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수야~, 아버지는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고 빚쟁이는 엄마를 쥐어뜯는데 너희들이 날 안 도와주면 엄마는 이 농사 어찌 짓노? 남의 빚은 언제 갚노?” 하소연하며 모자는 함께 울었다.

명인은 이 같은 일 말고도 많은 고초로 숱한 눈물을 흘렸다.
“오죽했으면 제가 ‘섬진강아, 너는 이 여인의 마음을 아느냐. 지리산 백운산 굽이굽이 이 여인의 눈물이 보태져 맑고 아름다운 섬진강물이 됐겠지’라며 한탄의 글을 썼겠어요. 그래도 전 아버지 덕에 한글을 배워 언젠가 ‘배움’이란 글을 썼지요. ‘배움’이란 글귀 맨 끝엔 이런 글을 썼어요. ‘낮엔 소같이 머슴같이 일을 하고 저녁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혼자 공부하는 나는 야학생’이라고...”

1등의 책을 읽고 1등 농사 목표
명인은 2등을 하는 사람의 책을 별로 안 보고 1등을 하는 반기문 총장이 쓴 책이라든가 미국의 힐러리가 쓴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란 책을 봤다고 한다. 이 책은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또 ‘힐러리 파워’라는 책은 네 시간 만에 다 읽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이런 책을 다시 봅니다. 이런 책을 읽으면 이 사람들이 왜 1인자가 됐는가를 쉽게 이해하게 돼요. 이를 되새기며 항상 1등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죠.”

명인은 여기서 이런 말을 했다.
“악산에 꽃을 심으면서 꽃 모두는 내 딸이고 매실은 내 아들이며 아침이슬은 내 보석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겁니다. 그리고 ‘농사는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1등 농사를 지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홍쌍리 명인은 1등 농사를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고된 농사 끝에 드디어 매실 수확을 이뤄냈다. 매실을 맛있는 건강식품으로 만들어 국민의 식탁에 올리기 위해 인도, 하와이, 일본 등지의 여러 농장과 연구소, 공장을 분주히 견학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1977년 매실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1995년 그의 농원에서 처음 개최한 매화축제는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2018년엔 2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녀는 2000년 백만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청매실농원을 연매출 40억 원 달성의 1등 농민기업으로 키워내 우리 농업사에 길이 빛날 거인이 됐다.
끝으로 홍쌍리 명인은 새해를 맞아 취업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젊은이들이여, 영혼을 불태워봐라. 나는 악산을 밀어붙여 논과 밭을 만드는 인간 불도저가 돼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농업은 할 일이 많다. 출퇴근과 정년퇴직도 없다. 이런 직업을 왜 마다하느냐. 농촌으로 와라. 묵은 논을 가꾸는 전사가 돼라!”
농촌여성들에게도 격려와 용기의 말을 전했다.
“예민한 감성과 섬세한 손, 뜨거운 열정을 지닌 농촌여성들이 도시보다 소득을 높이는데 앞장서는 여왕벌이 돼야 합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