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옥산장여관 주인 전옥매 여사

강원도 정선군 여량(餘糧)땅 옥산장여관 주인 전옥매 여사는 나그네에게 방을 내주기보다 정선아리랑 공연으로 고객을 모은다.
전 여사는 6.25참전 상이용사 출신의 가난한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도와 가계를 이끄느라 행상을 하는 굴곡진 삶을 살았다. 특히 전 여사는 눈먼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랫동안 병석의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효부이기도 하다. 전 여사는 눈물어린 삶을 달래려고 아우라지를 돌며 무늬돌 1천여 점과 민속품 200여 점을 모아 전시해 고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험난한 삶을 극복한 전 여사의 성공담이 귀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으로 생각돼 소개한다. 

 전옥매 여사의 굴곡진 삶과
 아우라지․오장폭포․5일장 투어는
 귀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

20세 때 중매로 6·25 장애 상이용사인
초등교사와 결혼

“저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일본의 악랄한 착취로 나물죽, 보리개떡, 소나무껍질로 허기를 달래던 어려운 시절이었죠. 제 어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던 시대의 7대독자인 아버지를 만나 딸만 셋을 낳았어요. 저는 그중에 막내딸이죠. 어머니는 아들을 못 낳은 책임을 몽땅 덮어쓰고 아버지의 모진 학대를 감내하며 살아야 했어요. 끝내 아버지는 대를 이으려고 둘째 어머니를 두면서 어머니에 대한 학대는 더욱 심해졌어요. 저는 이런 어머니를 어려서부터 정성으로 돌봐드려 효녀라는 칭찬을 들으며 자랐던 터라 결혼 후 눈먼 시어머니도 지극 정성으로 돌봤습니다.”

전 여사는 스무 살에 결혼을 했다. 시부모는 9남매를 두었지만 딸 하나만이 살아남고 모두 죽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마흔다섯에 뒤늦게 막내아들을 낳았는데, 그 막내아들이 전 여사의 남편이었다.
“시아버지는 한의사였어요. 목재상과 금광사업을 크게 하시다가 실패하자 그 충격으로 남편이 6살 때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만난 남편은 편모와 누이 슬하에서 18살 때 초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교편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습니다. 남편은 부상으로 다리를 저는 상이용사가 돼 집으로 돌아왔죠. 시어머니는 아들의 부상당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 여사는 느닷없는 중매로 시어머니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모른 채 결혼을 했다. 눈먼 시어머니가 결혼식에 못 온 탓에 시누이와 함께 충주로 가서 시어머니를 만났다. 전 여사를 맞은 시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고 한다.
“아이구~ 우리 며느리 왔구나. 며느리가 왔는데 내가 이 꼴을 하고 있으니 어째야제~ 어째야제~”하며 통곡을 했다. 가까스로 몸을 가눈 시어머니는 전 여사의 몸을 어루만지며 더듬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눈 대신 손의 감각으로 전 여사의 생김새를 더듬어 그려냈다. 시어머니는 어느새 전 여사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어디보자 엉덩이는 튼튼하네. 애를 쑥쑥 잘 낳겠네. 고맙다 아가야 고마워...”
그러자 전 여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도 함께 울고 있었다. 전 여사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진심으로 편안하게 모셔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시모 눈뜨게 하려고 길쌈에 행상까지
1983년 지금의 옥산장여관 지어

그때 시어머니의 나이는 일흔하나였다. 이후 전 여사는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셔 시어머니와 사별한 지 18년 만에 정선군 향교에서 주는 효부상을 탔다. 그간 정선군 내 효부상 제도가 없었던 터라 뒤늦게 효부상을 탄 것이다.
“시어머니 생전에 돈이 모이면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병원과 약을 찾아 헤맸어요. 그러나 치료시기를 놓친 탓에 끝내 시력을 찾지 못하셨죠.”

그 무렵인 1958년 정월초에 전 여사는 첫 아들을 얻었다. 아이가 조금 크면서 전 여사는 돈 벌 궁리를 했다. 방아도 찧고 맷돌도 돌리며 뽕잎도 따주고... 이런저런 일로 돈을 모았다. 시어머니로부터 길쌈 하는 방법을 배워 밤낮으로 길쌈을 했다. 그리고 소 한 마리 값에 버금가는 재봉틀을 사서 시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터득한 재봉기술로 1962년 52만 원을 모아 밭 2500평과 논 서마지기, 그리고 큰집을 샀다.
1962년 화폐개혁 후 전 여사는 돈을 더 벌려고 장에 나온 콩과 옥수수를 사서 멀리서 온 장사꾼에게 넘겼다.

“그때는 보따리 행상으로 여기저기 떠도느라 밥도 숱하게 굶었어요. 행상길에 찹쌀과 수수, 옥수수 등 곡식과 말린 밤가루로 만든 미숫가루로 허기를 달래며 장사를 했죠.”
전 여사는 옥산장여관의 손님이 배고픔을 호소하면 이 미숫가루를 타서 드린다고 했다.
전 여사는 먼 길을 갈 땐, 차비를 충당하려고 출발지에서 물건을 사서 도착지에서 파는 행상을 했다. 그는 철원으로 전근 간 남편을 보러가다 들른 강릉에서 눈부신 빛을 띄는 그릇을 보고 여량으로 가져와 되파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전 여사는 막내아들이 서울 외국어대학에 진학하고 딸이 공무원시험 준비로 서울에 머물러야 될 상황이라 서울에 2500만 원을 주고 집을 장만했다.
“보따리 장사로 남편 모르게 집을 샀다가 되팔며 재산을 불려 한 때는 집을 다섯 채나 소유한 적도 있었죠. 1983년에 여량에 개발붐이 불었는데, 이때 행상보다 숙박업에 뛰어들어 여관을 짓기로 했죠.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옥산장여관을 지었죠.”

수집품과 정선아리랑 공연에 매료된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

전 여사는 여관을 지으면서 정선아리랑 10곡을 익혀 공연 손님을 모았다. 그리고 아우라지에서 고달픈 삶을 위로하며 1~10까지의 아라비아 숫자와 십이간지 동물, 예수, 부처형상의 갖가지 무늬돌을 모았다. 다양한 민속품도 모았다.
이 같은 전 여사의 문화활동에 매료된 유홍준 교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국어와 일본어판에 옥산장여관 얘기를 수록했다. 이후 일본 NHK를 비롯한 국내외 신문, 방송에서 잇따라 옥산장여관을 소개했다.

이러한 홍보 덕에 옥산장에는 하루에 500여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달 5월17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식객 400여 명이 전 여사가 차려준 맛깔스런 한정식을 맛보며 전 여사의 무늬돌에 얽힌 재미난 얘기와 정선아리랑을 듣고 갔다고 한다.
옥산장여관 근처엔 사연이 많은 아우라지와 구절리에는 200여m 높이의 인공폭포인 오장폭포가 있다. 그리고 석탄을 실어 나르던 7.5㎞의 철로를 활용한 레일바이크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특히 매월 뒷자리가 2와 7로 끝나는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에 열리는 정선5일장에는 특별열차편으로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강원 산촌의 갖가지 특산품을 사간다. 그리고 옥산장에서의 1박 숙식이 포함된 코레일의 관광상품을 이용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꽤 된다. 농촌여성신문 독자와 가족들도 옥산장을 찾아 전옥매 여사가 살아온 얘기를 듣는다면 귀중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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