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시골로 내려간다는 우리를
주변 사람들은 무지하게 말렸다.
촌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
또래 친구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전통 농사일을 경험하며 자랐기에
극구 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농촌으로 내려온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넘었다. 결혼해서 한 평생을 서울에서 살다가 오십대 중반 느닷없이 시골로 내려간다는 우리를 주변 사람들은 무지하게 말렸었다. 더욱이 촌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 내 또래 친구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그들이 살았던 성장기의 농촌이란 우리나라 60년대였으니, 옛날 전통방식의 농사일을 경험하며 자랐던 그들은 극구 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땐 그런 농촌을 벗어나려고 도시의 회사원(화이트칼라)에게 시집가는 것이 최고의 꿈이기도 했으니까.

왜 마누라를 농촌으로 데려가서 귀양살이를 시키려 하냐고 남편에게 대놓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십 년 전 그때만 해도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먹고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찾거나 시골의 부모님께로 내려가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귀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한 번도 농촌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일까? 나는 그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1991년이라 기억되는데, 다니던 교회에서 정농회 소개로 일본 애농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농촌발전연구회(농발연)이라는 모임을 가졌는데, 일 년에 한 번 어려운 농촌 목사님을 돕자는 취지였다. 농촌 목회자분을 모시고 세미나를 열고 집에서 입던 헌 옷, 쓰지 않는 가전제품, 치약, 타월 등 일상용품을 모아 나눠드렸고, 그 지역의 농산물을 사서 교회 신협에서 팔았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 교회에서 ‘농발연’ 목사님들을 모시고 일본 애농학교를 가게 됐다. 일본 오사카 미애현에 있는 애농고등학교에서 85세 되신 고다니 준이치 선생의 반듯하게 두 무릎을 꿇고 쩌렁쩌렁하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삼아 고통준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는 일본을 따라하지 말 것과 10년만 지나면 한국도 틀림없이 일본과 같은 농약의 피해를 볼 것이므로 돌아서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은 하나님(神)을 사랑하고 인간(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해야한다는 진심에서 우러난 외침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없이 농촌, 농사, 농약, 유기농 그런 말을 여전히 귓등으로만 들었다. 4박5일 여정 가운데 여기 저기 유기농 농장을 방문했고, 마지막 날에 한 농장을 찾아갔다. 당근과 생강을 재배하는 곳이었는데, 생강의 크기가 주먹만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넓게 뻗은 농장 입구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허름한 옷에 모자를 눌러 쓰고 적당히 나이든 사람이 나왔다. 자기가 농장주라 소개하며 그는 “일본은 이미 사람이 살기엔 문명이 너무 지나쳐왔다. 그 문명을 피해서 농촌에서 원하는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통역사가 “그 사람은 동경에서 유명한 대학교수이며 강의 때만 도시로 나갔다가 여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했다. 나는 그때 그가 부럽고 참~ 멋져 보였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현하는 그의 삶이 내게 깊은 영향을 줬나보다.

우린 서울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느라 현실에 매여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왔었다. 삶을 선택하고 누리는 일은 생각도 못할 사치였다.
아직 대학공부를 다 마치지도 못한 두 딸에게 오피스텔을 얻어주고 서울의 재산을 정리하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가능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산골 괴산으로 내려왔다. 물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귀농에는 남편의 퇴직이나 도시문명에 대한 회의, 자연에 대한 동경, 건강문제 등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는 먼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선택했고 새로운 곳 제로점에서 남편과 함께 두 번째의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남은 생을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 잊고 살았던 서로에게 열중하며 다시 살아 볼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괴산까지 연결됐고 괴산 부동산을 통해 여러 집을 보는 중 목도강이 유유히 흐르는 배산임수한 이곳에 자리잡았다.
인생에 모든 일은 자신이 해석하기에 달린 터인지라, 고생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이 길 위 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믿으며 벌써 10년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하루하루를 만나며 낙낙(樂樂)소풍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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