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우리나라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뚜렷하게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국민학교’ 상급학년 적 자연시간을 통해서였다. 즉 지구가 중심축이 23.5。 기울어진 채로 스스로 24시간 동안 도는 자전(自轉)을 하고,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公轉)을 1년간 하기 때문이란 것을. 그것을 지구 중심으로 얘기하면, 태양이 뜨는 최고 높이에 따라 24절기가 나뉘는 이치다.

우리 옛 선인들은 양력을 쓰기 전에는 모두 음력으로 시절을 가늠했고, 동·식물, 즉 자연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통해 몸으로, 오감(五感)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마디마디 재단질을 했다.
그 식으로 치자면, 지금은 양력 6월이지만 음력으로는 5월로 단오(음5월5일, 양력 6월20일)와 하지(음5월7일, 양력 6월22일) 절기가 들어있다. 그야말로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이라, 우거진 나무그늘이 서늘하고 꽃다운 풀들 울울창창 우거지는 한 여름의 들목이다.

‘오월이라 한 여름 되니 망종·하지 절기로다/ 남쪽바람 때 맞추어 보리추수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 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보리타작 하오리라.’
<농가월령가>의 ‘5월령(五月令)’ 첫 연이다. 보리가 채 익기도 전에 푸른 보리이삭으로 청맥죽을 끓여 먹던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니 보리가 더없이 귀했겠지만, 쌀농사가 주업이었던 우리 집에서는 땡볕에서 땀 빼는 보리타작날이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그 억센 보리 까끄라기 때문이었다. 종달이 알을 줍고 깜부기로 검정칠을 해대며 술래잡기를 하던 보리밭 추억은 이날 만큼은 정말 새까맣게 잊고, 한가롭게 뻐꾸기 우는 먼데 앞산 소나무 숲으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보리타작날은.

이때가 바로 일년 중 해가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무려 14시간35분으로 일년 중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 절기다. 1년 24절기 중 열번째로 올해는 6월22일에 들었다.
웬만한 곡식은 하지까지만 심으면 거둬 먹는다는 절기 속설이 있다. 농사꾼의 몸시계대로라면 ‘모내기 끝, 장마 시작’의 절기다. ‘하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 ‘하지날은 감자 캐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 등등 이때의 농삿일에 대한 속담들이지만, 올해는 그 하지가 아니다. 긴긴 가뭄으로 볏논은 쩍쩍 갈라지고 보리환갑은 저만큼 뒷전이다.
그러나 누굴 탓하랴, 이 모두 물신(物神)들린 인간들이 자초한 일인 것을, 하늘의 뜻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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