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있는 곳엔 썩은 고기에 쉬 슬듯 돈이 꼬이게 마련이다. 권력과 돈이 결탁해 한통이 되는 것을 이르는 금권야합(金權野合)은, 왕권세습과 외척(外戚)의 뒤엉킴 속에서 정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조선조 말에도 극심했다.

‘강화도령’ 철종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12살 난 둘째아들 명복을 고종으로 즉위시킨 신정왕후 조대비는 조정의 실권을 틀어쥐고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측근에 끌어들여 정책 결정권을 주고 집정케 했다.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몰락하고 풍양조씨 조대비를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루는 대원군이 100만냥을 들고 들어와 조대비에게 바쳤다. 조대비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 큰돈이 어디서 났소?”
“이것은 그동안 세도를 부리던 김병국이 축재한 돈을 거둬들인 것이오니 용동궁(龍洞宮;조대비 개인 사저)에 저축하시옵소서.”
이 일로 안동 김씨 세도가였던 김병국은 사형을 면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며칠 뒤에는 대원군이 김병학·김병기 두 형제가 목숨 값으로 바친 1,000석 가량의 땅을 다시 조대비전에 바치면서 말했다.
“이 땅은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뇌물이었던 것이오니 부디 용동궁으로 보내십시오.”

이와같이 대원군은 몰락한 당대 권세가들의 재물을 몰수하다시피 바치게 해 조대비 개인금고를 불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권세를 다져갔던 것이다.
왕실의 금고지기는 또 있었다. 고종때 한낱 미천한 북청물장수 출신으로 준족(駿足, 빠른 다리)하나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업고 출세가도를 달려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용익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는 “나라 안의 모든 금광은 군주(君主;고종을 이름)의 것이고, 군주의 재정은 광산이 부담한다”며 전국의 금광 채굴권을 수십 년간 장악하고 고종임금의 개인금고를 채워주는 것으로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오죽하면 금광에서 캔 비둘기 모양의 천연 금 원석을 바친데 이어 송아지 모양의 금 한필을 구해 바치겠다 해 그뒤 고종임금이 이용익을 찾을 때는 ‘금독(金犢;금송아지)’이라 별명을 지어불렀다 하여 대궐 내에서는 모두 그를 ‘금독대감’이라 했다. 그 고종임금의 금고지기도 말년엔 한일의정서 반대 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뒤 실종되는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 온 나라 안이 소위 ‘성완종리스트’로 벌집 들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다. ‘성회장의 금고지기’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니, ‘목숨 내놓을’ 사람 참 많을 것 같다. 그 목숨이 어디 두 목숨인가… 듣느니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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