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살고 싶은 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 어려분이 부럽습니다.’

이 글은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25차례의 방사선 치료와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 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36세의 나이로 지난달 16일 세상을 뜬 영국의 두 아이 엄마 샬롯 키틀리씨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블로그 내용이다.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를 다했음에도 죽음의 신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만큼 죽기 직전까지 삶에 대한 절절한 애착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등까지도 토닥여 주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처연함마저 갖게 한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통이 함께 했을까. 그래서 죽음의 질은 한 인간의 참가치를 마지막으로 끌어올려 준다는 데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또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느냐 하는 문제도 이젠 초고령화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화두가 되어 있다.
서울대 의대가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과 함께 조사해 내놓은 ‘한국인이 느끼는 죽음의 질’ 조사는 그래서 눈길을 끈다. 40세 이상 한국인 500명을 대상으로 ‘누구나 행복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임종하는 사회는 100점, 모두가 불행하게 살다가 괴롭게 임종하는 사회를 0점이라고 할 때, 한국 사회는 몇 점쯤 되느냐?’고 물은 결과 낙제점인 평균 49.4점이 나왔다. 이번 조사에 응한 사람은 모두 중장년과 노인이고, 응답자 절반 이상이 가족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인생의 끝을 어떻게 잘 마무리 하고 떠나는가… 하는 죽음의 질을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해야 할 시점에 우리 사회가 다다라 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이 시 <해바라기 비명(碑銘)>을 쓴 함형수(咸亨洙)란 시인은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정신분열증으로 저 세상에 갔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야 이승이 낫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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