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인 보리·밀을 거둬들이는 맥추(麥秋)절기 망종(芒種)과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 절기가 지났다. 아직은 초여름인데도 삼복(三伏) 염천(炎天)처럼 숨이 헉헉 턱에 찰 만큼이나 더우니 살아가는 것 만큼이나 세월을 가늠키 어려운 세상이다. 하기사 첨단과학이란 이름으로 제철 먹거리가 제 때를 잃어버린 마당이니 말해 무엇하랴?
어렸을 적, 지금은 시때 없이 봄여름갈겨울 먹을 수 있는 딸기며 아이스크림은 고사하고, 참개구리 등껍질 색깔에 커다란 배꼽을 달고 있는 성환 개구리참외며 어른 대갈빼기 만한 수박, 그리고 처마밑에 갈무리 해 둔 마늘 두 통과 물물교환으로 바꿔먹던 아이스케이크는 한 여름에만 만날 수 있었던 진객(珍客)이었다. 그래서 여름이 더 여름답고 겨울은 겨울대로 한겨울의 정취가 있었다.
이때 쯤이면 대강대강 살아가는 시골살림이라 하여도 먹성과 입성이 달랐다. 먹성이야 문 밖만 나서면 지천으로 널린 게 푸성귀 천지였으니 입호사가 따로 없고, 입성이야 형편 나름이긴 해도 흰 광목(廣目)이며 옥양목(玉洋木), 모시며 삼베 적삼으로 어석서걱 무더위를 날렸다. 뿐이랴. 대발[竹簾, 죽렴]에 대나무·왕골돗자리, 대베개인 죽침(竹枕)과 대오리[竹絲]로 만든 부채는 여름을 나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 생활도구였다. 이와함께 사대부가 사랑채에서 안방마님보다 더하게 바깥양반의 사랑을 진득하게 한몸에 받는 물건이 있었으니, 이름해서 죽부인(竹夫人)이다. 무생물인 대나무를 사람처럼 의인화시켜 버젓이 부인이라 호칭하는 것 자체가 그 남다른 격을 이름이다.
죽부인은 사용하는 사람의 키만큼 길고 누워서 안고 자기에 알맞은 정도의 원통형 대나무 제품이다. 잘 마른 1년생 대나무 황죽을 12날을 잡아 참숯불에 지지면서 엮어 만드는데, 속은 비어있는 연통같아 숭숭 뚫려있는 구멍으로 바람이 잘 통하게 되어 있다. 만들 때 손질을 하여 잔털이 돋거나 가시가 서지 않게 마무리 한다. 숯불에 지져 색을 내는 것 외에는 콩댐을 하거나 생옻을 칠하는 등의 가공을 하지 않는데, 이는 여름철 땀에 씻기거나 묻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성글게 지그재그식으로 엮어 짤 때 끈이나 못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품어 안았을 때 온전히 매끄럽고도 시원한 대나무 촉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한여름 삼복(三伏)에도 이 죽부인에 삼베 홑이불을 씌운 다음 가슴에 끌어안고 한 다리를 죽부인 몸통에 척 걸치고 잠을 청하면 허전함을 덜 뿐만 아니라 서늘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니 ‘더위여 안녕!’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애용하던 죽부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알기도 했으니, 오상(五常)의 가르침이 오롯이 배어있는 죽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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