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그날도 언제나 그랬듯이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무심한듯 유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숲길 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구름 한가이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듯 맑아라./ 푸른산 푸른산이 천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흘러 만년만 가리…’
이 ‘산수도’(山水道, 신석정의 시), 이산 저산, 이골 저골 다 떨쳐두고 어찌하여 범처럼 무섭다는 망망대해 맹골수도(猛~水道)에서 서럽게 붉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는가.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신록’(新綠, 서정주의 시)처럼 푸르디 푸르게 돋아나야 할 영혼들이 아니던가. 누가 이들을 어둠속 시린 물속에 가두어 놓았는가. 이 땅에 살아남은 자 모두가 부끄러운 아침이요, 또다시 맞고 보내는 천추(千秋)같은 ‘세월’이다.
아주 먼 옛날, 신라 진평왕 때의 벼슬아치 김후직(金后稷)은 왕이 정사(政事)에 소홀하고 사냥에만 빠져 이를 극구 말려도 듣지 앉자, 뒷날 병들어 죽어가면서 이렇게 유언했다.-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으니, 내 시체를 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어달라.”
뿐이랴.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의 브레인 정도전(鄭道傳)은 <경제문감(經濟文鑑)>에서- ‘사특하여 임금의 총명을 어지럽히는 자, 법을 멋대로 하는 강호(强豪), 함부로 권력을 부리거나 속이고 충신(忠信)을 지키지 않는 자, 대신으로서 일의 사정을 그저 관망하면서 중립만을 지키는 자, 해이하고 태만하여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죄를 탄핵하여야 한다’했으니, 720여년 전이나 다름 없는 이 나라의 그릇됨을 바로잡는 이 없고, 만고에 씻지 못할 죄를 지어도 단죄(斷罪)하지 못한 채, 책임, 윤리의식이 실종된 채 침몰해 가는 ‘대한민국호’를 또한 곡(哭)하노라.
‘어릴 적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오고 가는 정이란 허망하기 일쑤고/ 주고 받는 말이란 부질없기 짝 없지만/ 논밭에 심은 뿌리 헛것 없다고/ 마음 허전하거든 씨앗을 가꾸라고/ 미리 아신 아버지는 일러 주셨지’… 그 아버지의 마음도 부질없어 세월만 야속하다. 그래도 그 세월의 끝을 잡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부끄러움이라니…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 일 버리고 어드메로 가잔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물러가리라’
삼가 꽃다운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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