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시골 ‘국민학교’시절, 새학기 초가 되면 교정은 흡사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듯 부산부산 했다.
겨우내 추위로 움츠려 있으면서 횟배앓이로 배춧잎 뜨듯 핏기없이 누렇게 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며 목소리, 초롱한 눈망울에도 생기가 돌았다. 땡땡땡~ 학교 종소리며 어느 교실에선가 울려나오는 풍금소리,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온종일 교정 구석구석을 맴돌았다.
새 담임선생님, 새 짝꿍, 새 교실, 그리고 새 교과서까지 모든 것이 기대감으로 여린 아이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길지 않은 봄방학 때 미리 배부받은 10권의 새학년 새학기 교과서에서는 향긋한 풀내음같은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머리카락을 그슬려 가며 싯누런 장판지를 잘라 정성스럽게 책표지를 쌌다. 천년 만년 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생각없는 아버지의 ‘풍년초’ 잎담배 때문에 어이없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고작해야 동네 구장(區長)집과 두어집 정도에 일주일치가 몰아서 우편배달부 편에 배달되는 신문도 귀할 뿐더러 변변한 화장지 하나 없이 볏짚을 둘둘 말아 용변 뒤처리를 하던 집이 태반이던 시절이었으니, 잎담배 말아 피우는데 아들의 교과서만한 종이가 어디 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란 이가 아무 생각없이 교과서 몇장 쭉 찢어 잎담배를 말아 피워댔으니 성한 교과서가 없었던 것이다. 이 기막힌 광경을 놓고 잠시 어이없어 하면서도 담임선생님은 아무 기색없이 옆자리 친구 책을 같이 보라고 일렀다. 워낙에 점심밥을 굶는 아이들도 많은데 이런 일 쯤이야~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따금 주눅 든 얼굴로 들어서던 교무실의 정가운데 벽면에는 글자 한 자가 아이들 머리통 만하게 각자(刻字) 된 커다란 한자 편액(扁額)이 위풍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걸려 있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이 글자의 뜻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함’이란 교육의 근본이념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 여러 해 뒤에는 ‘혁명공약’과 ‘국민교육헌장’이 학교 심장부에 깃발처럼 내걸렸다. -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그 40여년 전의 고전적인 학교 모습이 뒤바뀔 판이다. 서울시교육청이 2016년 종이와 숙제, 중간·기말고사가 없는 ‘디지털 미래학교’를 설립한다. 지금의 학교교육으로는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문제해결력이나 창의성을 기르기 힘들다고 판단해 이 수상한 ‘미래학교’설립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니… ‘자립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찾는’ 루소의 서양식교육관도 이 땅에선 강 건너 불일 뿐인가.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