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아버지의 소시(少時) 적 꿈은 가수였다. 6·25 난리통에 군에 징집돼 ‘살아서 돌아오라!’ 등등 마을사람들의 격문(檄文)이 어지럽게 적힌 태극기를 고이 접어 부적처럼 가슴속에 저며 넣고 5년간 최전방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도 혈기방자(血氣放恣)한 시골청년의 꿈은 오직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살아서 돌아간다는 기약이 거의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 “니 애비 가수된다고 집까지 나갔더랬다.”
결혼-군 제대-미군부대 취업 후 줄줄이 새끼들이 태어나자 어찌할 수 없이 가수에의 꿈은 사그라지고, 마을 콩쿨대회를 석권하는 것으로 펴지 못한 꿈을 불살랐다. 재직하던 직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이승에서의 생의 끈을 놓을 때까지 흥이 날 때면 아버지의 입에선 구성진 유행가 가락이 유성기처럼 흘러나왔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뿐이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김용만의 ‘남원의 애수’ 등의 유행가 가락도 심심치 않게 집 뒷담장을 넘었다.
새끼들이 커가자 아버지의 또다른 꿈은 새끼들에게로 옮아갔다. 맏자식이 아산만 언저리의 전교생 6~700명 정도에 불과한 촌학교에서 반장입네 우등생입네~ 하자 서울법대에 진학시켜 판·검사를 만들 작심을 했다. 자식의 꿈은 아랑곳 없이. 열과목 전과목 ‘올백(100)’이 안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집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중학교 서울 진학을 고등학교로 미룬 아들의 읍내 중학교 진학 때에는 끝내 수석입학 못한 것을 마뜩찮아 해 아들은 합격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삼키며 읍내에서 집까지 40여리나 되는 길을 진눈깨비를 맞으며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꿈은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가세가 바닥으로 기울고, 자신의 또다른 꿈의 전부였던 새끼들은 흡사 우렁이 새끼들처럼 제 아비의 살점을 다 파먹고는 하나 둘씩 떠나갔다. 평생을 허리 한번 제대로 펼 날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봄물에 떠밀려 오는 빈 우렁이 껍질로 남아 떠나간 자식들의 뒷모습 만을 그리다가 저승길로 떠나셨다.
자식이 직장을 옮길 때마다 “남의 밥을 먹으려면 네 콧속의 피가 말라야 하느니라”하셨던 아버지. 한 노교수는 그러한 늙고 쇠락한 노인세대를 찰기 없는 ‘모래’에 비유하면서 그러한 모래와 자갈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힘없이 떠밀려 내려오다 물살이 느려진 강하구에 쌓이는 공간을 ‘퇴적(堆積)공간’이라고 했다. 공원, 고수부지, 지하철역 등등의 퇴적공간에서 아버지의 꿈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늙어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만이 낡은 새마을 깃발처럼 나부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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