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해가 바뀌었는데도 음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섣달이다. 공교롭게도 양력날짜와 섣달 날짜가 같이 간다. 24절기의 마지막 절후인 소한·대한이 모두 이달에 들어 있다. 형뻘인 대한이 동생격인 소한네 놀러왔다 얼어 죽었다는 우스개처럼 맹추위의 기승 속에 세월은 세밑 그믐으로 치달려 간다.
예전에야 양력보다야 음력을 기준으로 살림살이 마름질을 했으니 생각할수록 그 적이 더욱 살갑고 정겹다.
‘십이월은 늦겨울이라 소한 대한 절기로다 / 눈 덮인 산봉우리 해 저문 빛이로다 / 새해 전에 남은 날이 얼마나 걸렸는가 / 집안 여인들은 새 옷을 장만하고 / 무명 명주 끊어내어 온 갖 색깔 들여내니 / 짙은 빨강 보라 엷은 노랑 파랑 짙은 초록 옥색이라 / .... / 입을 것 그만하고 음식장만 하오리라 / 떡쌀은 몇 말이고 술쌀은 몇말인고 / 콩 갈아 두부하고 메밀 쌀 만두 빚소 / 설날 고기는 계에서 나오고 북어는 장에 가서 / 납평일 (동지 후 세 번째 양의 날인 말일)에 덫을 묻어 잡은 꿩 몇 마리인가 / 아이들 그물 쳐서 참새도 지져 먹세 / 깨 강정 콩 강정에 곶감 대추 알밤이라 / 술동이에 술들이니 돌틈에 샘물소리 / 앞 뒷집 떡치는 소리 예서제서 들리네 / 새 등잔 세발 심지 불을 켜고 새울 때에 / 윗방 봉당 부엌까지 곳곳이 떠들썩하다 / 초롱불 오락가락 묵은 세배 하는구나’
<농가월령가>의 ‘12월령’이다. 물론 음력이고 마지막 달이라 하여 섣달이라 부른다. 설날을 맞기 전 설빔과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는 정경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이 사설시조를 지은이가 양반님네이니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일반서민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 이때가 되면 어머니는 야금야금 설 준비를 하셨다. 잰 걸음으로 발품을 팔아 10여리 떨어진 둔포장에 가 주렁주렁한 새끼들 양말이며 옷가지를 사오셨다. 집안 대주인 아버지의 명주 바지저고리며 마고자, 두루마기도 이때 말끔하게 마름질 해 장 안에 모셔두었다. 손놀림이 잰 막내삼촌은 비닐우산살인 대나무살을 손질해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다. 그 연은 연실에 사기가루를 짓이긴 풀칠을 해 동네아이들과의 연 싸움에서는 가히 무적이었다.
이렇듯 설날 달포 전부터 동네는 부산부산 했다. 산자를 튀기고 엿 고는 들큰한 냄새가 아이들의 뱃고래를 헛헛하게 했다. ‘어서 설날이 와야 할텐데....’ 조바심 속에서 설빔을 머리 맡에 모셔놓고 아슴아슴 잠에 빠져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그런 모습들을 쉬 찾아볼 수 없어 빈 가슴 속에 그리움만 켜켜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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