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어렸을 적, 이맘때쯤이면 김장김치 담그는 일로 온 집안이 피란살림처럼 어수선 했다. 아버지께서는 김장 담그는 날 한 이틀 전에 밭에 심어놓은 배추며 무, 졸파 등을 거두어들여 안마당에 아이 키높이로 켜켜이 쌓았다. 그리곤 늘 “김장은 일년 반식량이여~”하셨다.
그런 연후엔 뒤꼍 양지바른 곳을 골라 삽으로 깊숙한 구덩이를 몇개 파고 아이 키만한 오지 항아리로 된 김장독을 묻었다. 천연숙성냉장고인 셈이었다.
안마당에서는 어머니와 동네 집안네 아주머니들 서넛이 배추며 무, 졸파 등 김장재료들을 다듬고 씻고 소금에 절였다. 거의 하루종일 아주머니들이 재깔이는 입담과 까르르 한 웃음소리가 지붕 처맛기슭을 핥고 다녔다.
몇십포기 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소를 버무려 넣고, 알타리무 총각김치, 무 동치미에 파김치 담그기까지 사나흘을 초죽음이 될 법도 한데 아랑곳 없이 이때처럼 어머니께서 행복해 하신 적이 별반 없었지 않았나 싶다. ‘일년 반식량’을 장만하는 일에 대한 뻐근한 위세도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 시절엔 제대로 김장을 담가 먹지 못하는 곤궁한 집들이 동네 안에도 수두룩 했었으니까.
그렇게 저렇게 가을걷이며 김장이 끝나면 한 시름 놓고 한가로이 지낼 수도 있을 터인데 어머니는 야금야금 틈나는대로 밑반찬인 ‘건건이’를 장만했다. 김장 끝에 미리 여분으로 제껴놓은 무를 갸름하게 나박 썰어 대나무광주리에 넓게 헤쳐 넌 다음 몇날 며칠을 고들고들하게 말려 무말랭이를 만들었다. 노란 속살이 드러나게 길게 연 꼬리처럼 돌려 썰어 말리는 호박고지는 시루떡의 풍미를 한층 깊게 해주었다.
그뿐이랴. 무청을 삶아 말려 짚으로 엮어 맨 시래기는 겨우내 처마밑 바람벽에서 바람소리를 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첫손에 꼽던 건건이는 숭어와 그 새끼인 동어구이, 그리고 생굴무침이었다. 아산만에서 갓잡아올린 어른 팔뚝만한 싱싱한 숭어를 사들여 손톱만한 억센 비늘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다음 토막을 내서 왕소금 간절이를 해 광주리에 널어 꾸덕꾸덕 하게 말린다. 이 생선토막들을 콩깍지불에 노릇노릇 구워내는 것인데, 그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라니…. 아산만 포구에서 들어오는 생굴은 삼태기 모양의 대조리로 껍질을 골라내고 잘 씻은 다음 조선간장(집간장)과 깨소금, 고춧가루 약간, 새콤하게 익은 배추김치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무쳐내는데,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이젠 치매앓이로 하루종일 먼산 보기만 하고 지내신다. 그런 어머니의 ‘건건이’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배가 부른데, 이제 영영 그 손맛을 구경못하려니 생각하니 콧등이 시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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