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우리나라 근현대사상 돈(재물)보다 사람을 귀히 여긴 ‘부자(富者)다운 부자’를 꼽으라면 단연 경주 교동 최부자집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최부자집은 400년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萬石~)을 배출한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도 더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이 집안에서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정신유산’이다.
‘진사(進士)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이며 만석(벼 1만섬)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찾아오는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여서는 안된다. 며느리로 들어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이집의)사방 100리 안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러한 계율과도 같은 지엄한 이 집안의 유훈(遺訓)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지켜졌다. 실제 최부자집의 한 해 쌀 생산량은 약 3천석이었는데, 1천석은 집안에서 사용하고, 1천석은 찾아오는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최부자집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崔浚, 1884~1970)은 재산을 교육사업에 희사하라는 유지를 남겨 최부자집 전 재산은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했다.
돈과 재물은 어떻게 모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전에 아버지께서는 가세가 해가 지듯 기울어 가는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우리 4형제 대학공부를 시키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논밭 몇마지기 물려주는 것보다야 머리농사를 지어주겠다. 논밭은 쉬 없어질 수도 있지만 머리농사는 온전히 너희 것이 될 것 아니냐.”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정신유산이 아닐 수 없다.
얼마전엔 한 패륜아의 가족 살인사건이 온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부모와 형을 연탄가스로 질식사 시켰던 것. 더 말할 것도 없이 기십억에 이르는 부모의 재산과 사망보험금을 노린 존속살인이었다. 선대가 숨겨놓은 유산을 놓고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는 S재벌가 형제들의 막말 다툼도 볼썽사나운 우리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이 사회에서 인륜(人倫)이 실종된 지 이미 오래다.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유산 상속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50세 이상 조사대상자 10명 중 7명 정도가 유산을 아들·딸 구별 없이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나눠주겠다고 답했다. ‘장자 우선 상속’은 이제 옛말이 됐다. 그렇기로 자식에게 생목숨을 앗기는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으니 실로 개탄스럽기가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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