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열두살 어린 아들로 하여금 나라의 대통(大統)을 잇게 한 뒤 어린 왕[고종]을 대신해 섭정(攝政)을 하며 조선반도를 쥐락펴락 했던 대원군 얘기다.
‘파락호(破落戶)’니 ‘초상집 개꼴’이니 하며 온갖 멸시를 당하던 그가 서슬이 시퍼런 모습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좌에 앉자 그의 집 운현궁 솟을대문 앞은 온종일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이 들끓고 마차 수레바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무렵, 대원군이 첫 손을 댄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다시 세워 왕실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큰 중건 토목공사였던지라 왕실 재정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재정조달의 한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문세법(門稅法)이었다. 서울도성의 4대문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피같은 통행세를 한 푼씩 거둬들였다. 그나마도 성문에서 통행세를 받는 군졸들의 협잡질이 심해 민심이 날로 흉흉해졌다.
이때 이항노(李恒老)의 고제자로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가진 포천의 유림(儒林)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그 꼴을 보다 못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성문에서 한 푼 두 푼을 거두니 이는 동냥아치 거지의 꼴과 같아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속히 폐하여 주십시오.”
그런가 하면 장안 권번(券番)의 기생들의 화대(花代) 제도를 변경하여 모두 일정하게 수입에 따른 소득세를 내게 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거처인 운현궁에 ‘대령(待令)기생’이라는 전속 기생을 두고 있었는데, 때때로 이 대령기생들을 불러들여 문안인사를 올리게 하고는 세금을 물렸다. 그의 변인즉, “기생도 국가에 세금을 낼 의무가 있는 시대이므로 그 취지에 따른 것일 뿐 단순히 나 한 사람의 뜻이 아니니라”하였다.
그런 그도 10년의 실정(失政) 끝에 최익현의 상소로 권좌에서 밀려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요즘 우리 나라안에서는 여야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등 대규모 복지 확대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있지만 정작 그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최소화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곳간에 돈이 없는데 일단 퍼주겠다’는 식이다. 참 정직, 솔직하지 못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세금을 더 거두지 않고 무슨 수로 매년 27조원씩 5년간 135조원을 복지예산으로 투입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머리셈이 안된다. 결국엔 국민 혈세(血稅)의 증세(增稅)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면서도 눙치는 염치없음이 참으로 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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