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아오기’ 전 1950~60년대 이 산하에는 어느 곳 할 것 없이 채 아물지 못한 6·25 전쟁의 뼈아픈 상흔(傷痕)으로 얼룩진 헐벗고 굶주린 영혼들이 구천(九泉)의 넋그림자처럼 떠돌아 다녔다.
영영 헤어날 길 없을 것만 같았던 가난과 결핍 속에서도 새잎 나듯 동심(童心)은 맑게 피어났다. 이땅의 평화였다.
지금의 5060세대가 바로 그 시절에 유소년기를 보낸 이들이다. 워낙에 먹을 거리에 주려 있던 터여서 눈에 보이는 사방천지 산과 들이며 논과 밭에 널린 풀이며 꽃들과 이름모를 곤충과 물고기, 채소며 과일… 모두가 보는 것만으로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꼬맹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며 포만감을 안겨 주었다. 다 먹을 것들이었으니까.
지금보다는 훨씬 또렷하게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四季)가 나뉘어져 오고 가 철철이 그에 맞는 놀거리와 먹을거리 궁리로 작은 머리가 바빴다. 지금이야 시도 때도 없이 싱싱한 과일이며 야채가 쏟아져 나오지만, 그 시절이야 생각할 수조차 없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수박·참외·딸기·포도·토마토와 옥수수·오이·가지·호박은 오로지 한여름에나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바나나·오렌지·아이스크림은 저 먼 나라, 그것도 미국에서나 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때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 시절의 여름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땡볕에 훅훅 달아오른 시골마을의 한낮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나른한 권태에 빠져 졸고 있는듯이 적막하다. 마을 앞 신작로에 줄지어 선 미류나무의 늘어진 잎사귀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반짝 물고기 비늘처럼 은빛으로 팔랑거리고, 일제히 울어대는 쓰르라미 소리가 썰물처럼 바람따라 쏴-하니 쓸리어 왔다간 쓸리어 갈 뿐이다.
이때 염천(炎天)더위 아랑곳 하지 않고 부산한 건 마을 조무래기들이다. 특히 유난스러운 패는 마을 수로(水路)의 천렵패거리들. 제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는 수로의 양쪽에 진흙을 잡풀에 이겨 둑을 쌓은 다음 거의 한나절에 걸쳐 흙망둥이가 되어 씨근덕거리며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그 수로에 갖힌 메기며 가물치, 참붕어와 뱀장어, 미꾸라지를 손으로 더듬어 잡아올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하게 줄지어서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며 아산만 멱감기에 나선다.
저녁이 되면 마당가 화덕에 솥을 걸고 햇밀가루 반죽해 밀어썰고 애호박 송송 썰어넣은 칼국수를 끓여 식구모두가 멍석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눠먹고는 어른들은 뽀드득 하니 흰고무신 닦아신고 이웃집 마실에 나선다. 종일 산이며 들녘으로 쏘다닌 아이는 쑥더미 모깃불가 멍석위에서 곤한 잠에 빠져든다.
머리 위에서는 청청한 밤하늘의 은하수가 서남쪽으로 내를 이뤄 밤새 쏟아져 내리고… 요즘같이 잠못 이루는 열대야 속에서 생각하니 너무도 그리운 옛시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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