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조지훈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수필에서 주도에도 엄연히 바둑의 급수와 같은 단(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술 마신 연륜과 술 마신 상대, 마신 기회와 동기, 술버릇을 종합해 음주의 급수를 18계단으로 나눴다.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은 ‘부주(不酒)’, 술을 마시긴 하되 술을 겁내는 사람은 ‘외주(畏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을 ‘민주(憫酒)’,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은 ‘은주(隱酒)’라 하여 이들을 술의 진경·진미를 모르는 사람들로 구분해 최하위 그룹에 놓았다.
그리고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은 ‘상주(商酒)’,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은 ‘색주(色酒)’, 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은 ‘수주(睡酒)’, 밥맛을 돕기 위해 마시는 사람은 ‘반주(飯酒)’라 명명하고, 이들처럼 목적을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술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이들이라 하여 11~14등급에 두었다.
그리고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을 ‘학주(學酒)’라 하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주었다. 말하자면 ‘반주’는 2급이고, 최하위 18등급인 ‘부주’는 9급, 그 이하는 술을 멀리하는 반(反) 주당들이라고 규정했다.
‘학주’ 위는 취미로 술 마시는 ‘애주(愛酒)’로 ‘주도(酒徒)’라 칭했고, 그 위는 술의 진미에 반한 ‘기주(嗜酒)’로 ‘주객(酒客)’이란 칭호를 주었다. ‘애주’의 자리에 올라야 비로소 주도 초단을 주고, 기주는 2단이라 했다. 그 다음 차례로 올라가는데,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을 ‘탐주(眈酒)’라 하여 ‘주호(酒豪)’, 주도를 수련하는 ‘폭주(暴酒)’인 ‘주광(酒狂)’, 주도 삼매에 든 ‘장주(長酒)’는 ‘주선(酒仙)’,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석주(惜酒)’는 ‘주현(酒賢)’, 마셔도 그만 안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낙주(樂酒)’인 ‘주성(酒聖)’, 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인 ‘관주(觀酒)’- ‘주종(酒宗)’, 마지막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명인급으로, 술로 인해 저 세상으로 간 이를 이르는 ‘폐주(廢酒)’ 즉 ‘열반주’를 9단이라 하였다.
조시인의 이 주도 등급 분류에는 인간의 향기가 밴 격조나 있지만,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주폭(酒暴, 음주행패자)’은 ‘조폭(組暴)’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 하루 술 소비량이 맥주952만병, 소주896만병, 하루 술 먹는 성인은 598만명으로 매일 성인 6~7명 중 한명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있다니 우리 사회가 ‘술 권하는 주폭사회’로 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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