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1950~60년대 ‘라디오 시대’에 연속극과 고교야구, 축구, 복싱중계 등의 스포츠 중계방송을 빼고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던 프로그램으로 ‘유쾌한 응접실’ ‘한밤의 음악편지’ ‘0(영)시의 다이얼’이 있었다.
그중 ‘유쾌한 응접실’은 신군부의 방송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DBS)의 공개방송 프로그램이다. 이 토크프로그램은 당시 동아방송의 아나운서실장이던 전영우 아나운서의 능란한 사회로 양주동, 이연숙, 한국남, 엄익채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논객(論客)들이 그때그때의 주제에 따라 특유의 입담을 거침없이 풀어놔 방청객들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전깃불이 채 들어가기 전이어서 석유 등잔불 심지를 돋울녘이면 저녁상 물리고 제 몸보다 더 큰 뭉툭한 밧데리를 검정고무줄로 친친 감아업은 자그마한 라디오에 쫑긋 귀를 세우고 “하~, 옮거니!”하고 연신 무릎을 쳐대는 시골마을 촌로(村老)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것도 그때의 정경이다.
출연자들의 호칭은 학위가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박사’였는데, 전영우 아나운서의 격조와 재치가 있는 사회솜씨도 일품이었지만, 출연자의 한 사람인 무애 양주동 박사는 스스로 ‘대한민국 인간국보’임을 자처하며 걸찍한 재담(才談)을 구구절절 끝도 없이 늘어놔 방청객과 청취자들의 배꼽을 쥐게 했다.
‘유쾌한 응접실’이 비교적 연장자층이 주고객(?)이었다면 ‘한밤의 음악편지’와 ‘0(영)시의 다이얼’은 당시의 20~30대가 열광하던 프로그램이었다.
MBC의 간판 심야프로였던 ‘한밤의 음악편지’는 아나운서 임국희가 진행을 맡았던 팝음악프로그램으로 청취자들의 신청곡 엽서를 받아 소개하고 음악을 들려주는 형식이었는데, 임국희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목소리 더빙을 맡아하던 장유진이라는 성우의 뇌살시키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빠져 많은 젊은이들이 하얗게 밤을 새웠다. ‘한밤의 음악편지’에 소개됐던 엽서들은 나중에 책으로 묶여 나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동아방송(DBS) 최동욱 아나운서로 시작해 이장희·윤형주로 진행자가 이어졌던 ‘0(영)시의 다이얼”역시 소위 ‘청년문화’와 통기타·청바지로 대변되던 당시 젊은이들의 혼을 빼갔던 심야 팝음악프로였다.
그때는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여서 ‘0(영)시’가 주는 아주 특별한 의미는 곧 체제에 눌리고 항거하던 젊은 청춘들의 해방구나 다름 없었다.
그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인데,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그적의 정서를 누릴 프로가 없다. ‘그밥에 그나물’인데도 시청률 운운하며 모국어 구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함량미달의 방송진행자를 앞세우고 있는 저의를 알 수 없다. 아, 옛날이여! 아, 라디오시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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