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재물이나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 수법 중에 ‘마다리’라는 기가 찬 착취방법이 조선시대 말기에 성행한 적이 있었다. 고종때 문신인 세도가 민영준(閔泳駿, 1852~1935)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처음 궁리해내어 그 수법으로 당대 조선 제일이라 이를 만큼의 부(富)를 쌓았다.
‘마다리’란 말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면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민영준은 평안감사로 부임하자마자 도내의 내로라 하는 부자들을 가려내 명단을 만든 다음 재산 상태를 낱낱이 체크해 보고 그 부잣집들을 하나씩 하나씩 직접 찾아갔다. 부자들은 느닷없는 신임감사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조아리고 한결같이 ‘감사 방문의 영광’에 대한 감사 표시로 수백 수천냥의 사례금을 내놓았다.
민영준은 이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부자에게 넌지시 “조정에서 내 천거로 당신을 발탁하여 어느 군의 수령으로 임명하게 되었다”느니, “과거에서 선발하게 될 것”이라느니 하며 능청스럽게 축하 인사말을 건넸다. 신임감사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만 해도 더없는 가문의 영광인데, 벼슬까지 시켜준다니 그 아니 감격스럽겠는가. 부자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해대고는 “얼마의 사례금을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미 부자들의 재산상황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꿰고 있는 민영준은 미리 머릿속에 정해 놓은 거액의 상납금을 제시하고는 감영으로 돌아갔다. 막상 그러마 하고 약조는 했지만 워낙에 거금인지라 부자들은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돈을 해올렸다가는 가산이 풍비박산 날 판이니 하는 수 없이 감영을 찾아가 ‘마다(그만두다)’ 청원을 했다. 즉 고을 수령벼슬이니 과거급제니 전부 ‘마다’할 것이니 사례금을 깎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민영준은 짐짓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고나서는 귀엣말로 이렇게 말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그러하다니 내가 위에다 잘 말해 감해 보도록 하겠네.” 그런 식으로 처음 제시한 금액의 절반, 혹은 3분의 1을 챙겼고, 부자들은 오히려 감지덕지하여 신임감사의 너그러운 배려를 눈물겹게 고마워 했다. 이 ‘마다리’착취수법은 그 뒤에 여러 조정 권신들에게도 전파돼 부정축재의 ‘비전(秘傳)’이 되었다.
요즘 신문지상에 떠다니는 대문짝만한 ‘돈봉투’글자가 물가고·생활고에 시름겨워 하며 그래도 새해 머리맡 ‘슬픈 희망’이나마 보듬고 사는 서민들을 가슴시리게 한다. 고무신·막걸리-차떼기 사과상자… 하더니 이젠 노골적인 국회의장의 돈봉투라니, 아, 정말 “껍데기는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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