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먼산이 불러 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 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오름을 금할 수 없다.’
국어학자인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이 1930년대에 발표한 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 중 ‘독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일석은 가느다란 벌레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흐르는 달 밝은 밤, 달빛에 젖고 벌레노래에 엮어진 청신한 진주 떨기 같은 눈 부신 이슬방울, 그리고 얼 하나 없이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한 창공을 가을의 전령사(傳令使)로 첫 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가 지은 <권학가(勸學歌)>는 학문 이루기의 어려움을 얘기한 것이지만, 이 시구절에서도 가을은 소리로 온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금방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잠깐의 시간이라도 가벼이 하지 말라)/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못가의 풀들이 아직 봄꿈에서 깨기도 전에)/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마당가의 오동나무 잎이 가을소리를 낸다)’
그런가 하면 <농가월령가>의 ‘7월령’에는 여름 막바지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절의 정취가 일찌감치 고향 떠나 사는 이들의 객수(客愁)를 자아낸다.
‘늦더위 있다 해도 계절을 속일소냐/빗줄기 가늘어 지고 바람도 다르구나/나뭇가지 위의 저 매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랑하는가/칠석(七夕)에 견우직녀 흘린 눈물 비가 되어/성긴 비 지나가고 오동잎 떨어질 때/눈썹같은 초승달은 서쪽 하늘에 걸리고/…/달빛 다듬이 소리소리마다 바쁜 마음…’
시골 고향의 가을은 시름시름 그렇게 왔다. 한낮엔 숨이 헉헉 턱에 차도록 덥다가도 해가 떨어질녘이면 목덜미며 겨드랑이를 스치는 바람이 서늘서늘 해져 어른들은 ‘찬 바람 났다’고 했다.
이젠 혹심했던 더위도, 지리했던 장마도, 여름내 괴롭히던 모기도 뚝, 가을이렷다~ 뭐 대충 그런 뜻의 수사였지 싶다.
이 8월엔 칠석(6일)과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 8일), 그리고 말복(末伏, 13일)과 더위가 물러가고 찬바람이 난다는 처서(處署, 23일)절기가 들어있다. 아직은 폭우며 태풍 예보에 여름내 파죽음이었던 심신을 말끔히 헹궈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대자연의 철리를 뉘라서 거역할 것인가. 이제 가만 귀 열고 오곡이 익어가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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