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우리 역사인물 가운데도 이른바 영재로 불린 인물들이 수없이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금오신화>를 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도 그중 하나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정치적 격동과 유교와 불교의 교체기라는 사상적 변혁 속에서 저항과 탄압이라는 양극 사이에 끼어 방황 하다가 불우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는 이미 다섯살 때 사서삼경 중 <대학><중용>에 통달해 ‘신동(神童)’소리를 들었으며, 타고난 시재(詩才)로 세종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집현전학사 최치운(崔致雲)은 그의 천재성을 보고 경탄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어줬다.
그렇게 촉망받는 ‘신동’은 열세살 때까지는 학문에 정진했으나 열다섯살 되던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아버지마저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는 가정적 불운이 겹쳐 삼각산 중흥사라는 절에 들어가 입산수학 하게 된다. 그렇게 스무살 넘도록 벼슬해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울울해 하던 중에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듣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3일간 대성통곡을 하고나서는 서책을 모두 불사르고 삭발을 한 다음 승복을 입고 설잠(雪岑) 이란 법명으로 기약없는 방랑길을 떠난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한살.
그렇게 10년을 떠돌다 서른한살 때 경주 금오산에 정착해 7년을 머무르면서 <금오신화>를 써서 남긴다. 그뒤 성종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울 근교 산자락에 우거하면서 당시 세도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조롱하는 등의 기인행각과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떠돌다가는 47세 때 홀연 환속, 머리를 기르고 결혼하게 되는데, 부인이 곧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다시 방랑길에 나선다. 그리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정처없이 떠돌다 59세 되던 해인 1493년 세상을 떠났다.
훗날 선조임금의 명을 받들어 김시습 전기를 쓴 이율곡은 그를 ‘동방의 공자’ ‘백세(百世)의 스승’이라고 우러러 받들었다.
열흘 전, 실업계 전문고 출신으론 처음으로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합격해 화제가 되었던 부산의 ‘로봇영재’ 조모 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적분학 낙제점으로 인한 학사경고와 여자친구와의 결별이 자살동기였다는 것. 본인도 인성에 문제가 없는건 아니지만, 학교는 학교대로 영재들의 발전 잠재력에 대한 사후관리가 허술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못다 핀 꽃 한송이’ 어린 영재의 죽음을 대하고 나니 저 역사시대의 영재 김시습의 광기(狂氣)가 새삼스러워지기도 한다.
꼭 죽음만이 길은 아니었을텐데…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