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칼럼

동 열 모
미국주재 대기자

 

독립운동 나라찾아
농지개혁 실시
북한 남침 방어
청렴·청빈생활
업적 크게 되새겨야


탄생 135주년에 부쳐

오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한지 13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돌아오면 우리는 그의 탁월한 통찰력과 외교솜씨를 되새겨 보며, 그가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슬아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승만 박사는 1904년에 약관 29세의 나이에 고종황제의 밀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국을 미루고 조지 워싱턴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미국사회에 인맥을 구축하는 동시에 국제정세를 훤히 알게 되면서 공산당의 생리를 파악하고 그들과는 상존 못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했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해방 직후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에 말려들지 않았고, 대구 폭동이나 제주 4.3사건 등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남로당의 끈질긴 책동을 물리치고 UN의 승인을 얻어 대한민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이승만 박사는 우리나라가 군주체제에서 공화체제로 바뀌고 나서 첫 대통령이 된 것이다.
남한을 농민봉기로 하루아침에 석권할 작정으로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야욕도 이승만 대통령의 통찰력이 무너뜨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하자 초대 농림부장관에 좌경인물인 조봉암을 임명하고 농지개혁부터 서둘러 6.25직전인 그해(1950년) 4월에 마무리 지었다. 이 농지개혁은 6.25남침과 동시에 곳곳에서 일어났을 농민봉기를 미리 막은 효과뿐만 아니라 지주들에게 토지 보상금으로 발행한 지가증권(地價證券)이 당시의 가난했던 나라의 산업자금으로 활용된 효과도 매우 컸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그 힘겨웠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낸 일이다.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게 책임지운 덕분에 우리나라가 오늘의 경제 강국이 된 것이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한다.
3년여 동안 밀고 밀리는 힘겨운 6.25전쟁에 지친 미국은 휴전을 서둘렀고, 한국이 소련이나 중공의 위협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황급히 철군할 것을 예견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결사반대 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상대로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1953년 6월18일 야반에 단행한 2만7천여명의 반공 포로 석방인 것이다. 이 기상천외의 결단에 미국은 드디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차분히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 가혹한 동서냉전시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흔히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親美), 또는 숭미(崇美)주의자라고 하지만 오랜 미국생활을 통해 미국의 생리를 샅샅이 알고 있던 그는 미국의 막강한 힘을 마음대로 활용한 용미(用美)주의자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여년간 장기집권 했음에도 티없이 청렴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화장에 소장된 그의 유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 전시실에서 그가 평상시에 쓰던 파나마 모자를 직접 보고 필자는 머리가 수그려졌다. 그가 살아생전에 쓰던 고급스러워 보이던 그 모자를 가까이서 보니 마모된 모자 둘레를 손수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진실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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