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 생활변천사② - 옷(복식)의 발달

<베매기와 베짜기 하고 있는 아낙네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길쌈’(조선 후기).>

 

북방 유목민 영향…이미 고대에 저고리·바지·치마 착용해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꼭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미 선사시대에 풀이나 나무의 껍질,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몸의 주요부분을 가려 보호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오래 전에 발견된 유물자료로는 기원전 3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바느질용 바늘과 직물을 짜던 방추차, 그리고 몸을 치장하던 옥과 귀걸이, 팔찌가 발굴돼 그 기원을 짐작케 한다.
그 뒤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 모자, 띠, 신발 등을 착용해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대체로 우리 의복의 특징은 삼한사온이 뚜렷했던 아한대성 기후와 자연조건의 영향과 북방 유목민 계통의 문화양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 보면 저고리 소매와 바지가랑이는 좁게 되어 있으며, 속옷부터 겉옷인 포에 이르기까지 몸을 감싸는 형식인 중착의(重着衣)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기후조건과 실용성을 크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북방 몽고인들이 많이 입는 호복(胡服)계통의 앞쪽을 튼 카프탄(caftan)형식을 전통양식으로 취하고 있다는 것도 고대 우리 옷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 삼국시대 말기에 와서는 선사시대 기본형태를 바탕으로 중국 육조와 당나라 영향을 받은 복식이 유행해 전통과 외래문화의 이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무용총 가무도에 나타나 있는 남녀의 복식(고구려).>

 

삼국시대의 의복
‘유’라고 불렀던 저고리는 남녀 모두가 착용한 웃옷인데, 남자의 저고리는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통소매에 깃, 여밈, 소맷부리, 도련같은 데에 선을 둘렀다. 여자의 저고리도 남자 저고리와 대체로 같은 형태였는데, 특히 신라에서는 남녀 저고리를 위해라고 불렀으며, 차츰 우태, 우치, 웃옷으로 용어가 바뀌어 갔다. 유는 솜저고리나 겹저고리, 삼(衫)은 홑저고리로 요즘의 여름철 적삼을 말한다.
이외에도 짧은 저고리를 가리키는 내의(內衣)가 있었다.
바지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했는데,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들은 흰 천으로 만든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고 기록돼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남녀 모두 바지를 기본적인 하의로 겉옷이나 치마 아래에 입고 있다. 이때의 바지는 신분에 따라 폭과 길이, 색이 달랐는데 귀족층은 통이 넓은 ‘대구고’라는 바지를 입었고, 하류층에서는 통이 좁고 길이가 짧은 ‘궁고’라는 노동복 겸용 바지를 입었다. 노동복으로 입은 잠방이도 이 무렵에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속옷과 겉옷으로 바지를 입었는데, 이또한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옷감이 달랐다.
이 시대의 치마는 크게 상과 군으로 구분했는데, 상은 남자도 입는 길고 넓은 치마를 말한다. 사실상 이 치마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 정착된 말인데 적마-쵸마-취마-치마로 발전돼 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대체적으로 중국 원나라의 의복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시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전통복식이 완성된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복식제도는 사회제도의 발전과 발맞추어 크게 발달했는데, 실질적으로 우리 의복 양식이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사회 각계층의 신분에 따라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복식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래서 왕실과 벼슬아치, 선비와 서민, 천민의 옷이 달랐고, 관혼상제 때 입는 옷, 승려가 입는 승복 등의 특수복도 나라 법으로 제정됐다.
이때의 의복 양식은 고려시대 도입된 몽고풍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됐고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옷고름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근세 한복의 전통양식이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일반 서민들은 남자들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외출 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소창의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리고 갓을 쓰고 버선에 짚신을 신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중기 이후 싹튼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실용성을 크게 고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 저고리와 바지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의 긴저고리가 짧아져 깃이 바뀌고 안섶, 겉섶, 무가 넓어지고 품도 넓어졌다.
남자바지 중에는 통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었는데, 넓은 바지를 입을 때에는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매었고 발목을 대님으로 묶었다. 일할 때에는 통이 좁은 무릎길이의 베잠방이를 입었다.
계절이나 지방에 따라 옷감 만드는 방법과 입는 방법이 달랐는데, 겨울용 누비옷에 들어가는 솜의 원재료인 목화가 나지 않던 관북지방에서는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어야 할 만큼 의복난이 심각했다. 이때문에 인조임금이 겨울철에 대비하여 관북지방 백성들에게 저고리 500벌과 낙폭지(창호지처럼 질긴 종이) 400장을 보내 옷을 지어입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이로도 옷을 만들어 입었던 사실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이다.
◆ 여자의 의복
조선조때 서민 여자가 입었던 평상복은 저고리와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속곳이었고 버선과 짚신을 신었는데 특히 속옷이 크게 발달했다.
저고리는 중·후기 이후 길이가 크게 짧아지고 작아졌다. 이때문에 이를 커버할 수 있는 ‘졸잇말’이 생겨났다. 이 졸잇말은 가슴의 성장을 억제시키기 위해 베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겨드랑이 살을 가리는 가리개용 허리띠도 생겼다. 졸잇말은 훗날 일부지방(호서지방)에서는 주먹다듬이라는 성녀식풍습을 낳기도 했다. 즉 젖망울이 막 선 소녀에게 아픈 젖망울을 꽉 죄는 치마를 입히고 손가락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치마끈을 양쪽에서 당겨 옥죈다. 가뜩이나 젖망울 서 아픈 유방을 사정없이 압박하니 그 고통이 어떠했겠는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 하지 않은가.
치마는 특별한 변화는 없었는데, 신분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양반부녀자는 넓고 긴 치마에 금박을 입힌 것을 입었는데, 일반 부녀자는 민치마, 하인배는 종아리를 미처 가리지도 못하는 두루치를 입었다. 두루치는 민치마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 속바지가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 속옷
조선시대 여인네들은 일고여덟겹의 속옷을 겹겹으로 입어 둔부를 둥그렇게 부풀렸다. 속옷에는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너른바지, 단속곳, 무지기, 대슘치마 등이 있었는데, 이 속옷들이 겉치마의 ‘페티코트’ 역할을 했다. 치마 밑에는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순서대로 입었다.
가장 속에 입었던 다리속곳은 흰목면으로 만들어 허리띠를 달아 입었다. 그위에는 베나 굵은 모시로 만든 속속곳을 입었다. 바지는 종류가 다양했다. 속치마형 바지가 있는가 하면 밑이 없고 양다리만 있는 남자 양복모양의 바지, 밑과 뒤가 트여 여미게 되어 있는 바지, 고쟁이형 바지, 가랑이가 넓고 밑이 막힌 단속곳형 너른바지, 밑이 막힌 개량바지, 밑이 트인 조끼허리형 바지, 앞과 밑이 막히고 엉덩이 부분만 트인 바지 등 아주 많아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속옷양식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속옷풍습은 개화기를 거치고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단순화되어 다리속곳, 속속곳을 팬티 혹은 블루머로, 여자바지는 그대로 속바지로, 단속곳과 무지기는 속치마로 대체되고 자유복장시대로 접어들면서 패션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 갖가지 속옷들

① 은조사 속속곳(1930년대), ② 명주너른바지(1700년대), ③ 관사잔누비바지(1926년), ④ 인조겹바지(1930년대),  ⑤ 나일론청색개량바지(1942년), ⑥ 소색면누비바지(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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