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 생활변천사① - 화장품의 발달

<전(傳) 김홍도 그림 ‘화장여인’>

 

백분·연지·머릿기름·미묵·미안수가 고대의 주된 화장품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는 식욕, 성욕과 더불어 인간의 3대 욕망의 하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몸치레에 목숨걸듯 열중해 왔다. 자신의 몸에서 아름다운 곳은 더욱 돋보이게 하고 못나 보이거나 추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애써 감추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여성들의 노력이 화장품을 생겨나게 했고, 성형술을 발전시켰다.
물론 아름다움의 기준이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긴 했어도 분명한 것 하나는 남보다 예뻐지고 싶다는 욕구는 한결 같았다는 것이다. 고대 여인의 이상형은 외모부터가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서 발견된 흙으로 빚은 여인의 나체상을 보면,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곧 그때의 여인네 모습이라기보다는 여인의 이상형을 표현한 것이라는 게 문화사학자들의 견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남자들이 예찬한 미인상은 사뭇 구체적이다.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한 눈썹, 구름을 연상시키는 숱많은 검은 머리, 복숭아빛같은 발그레한 뺨, 앵두빛의 도톰한 입술, 박속처럼 흰 이, 가는 허리, 그리고 흰모래밭의 금자라처럼 아기작아기작 걷는 걸음걸이와 옥쟁반에 진주를 굴리는 듯 목소리가 낭랑한 여자….’
이를 조합해 연상해 보면 얼핏 아름다운 기생의 생김새다.
그래서 조선시대 남성들이 그렸던 이상적인 미인상과 이상적인 여인상은 가치관의 차이처럼 서로 달랐고, 몸을 가꾸는 화장방법 또한 달랐다. 한가지 공통점은 흰 피부를 가진 여인을 귀인(貴人)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렇듯 백색피부를 숭상해 그렇게 얼굴치장을 하는 화장품이 이미 고대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일본을 앞섰던 화장품 제조기술
이때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화장품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어서 백제와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이 일본보다 뛰어났고, 고려시대에는 향유(香油)가 수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일본이 화장수(미안수) 제조기술을 모방해 갈 정도였다. 이때의 주된 화장품은 백분, 머릿기름, 연지, 미묵, 미안수 등이었다.
특히 신라인의 미의식은 남달라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신라에서는 이미 1320년 전인 서기 692년 이전에 납을 화학처리한 연분(鉛粉)의 제조가 보편화 되었다. 애당초 백분은 쌀가루나 서속 등 곡식의 가루, 혹은 분꽃씨의 가루, 조개껍질을 태워 빻은 분말, 백토, 활석가루 등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백분은 부착력과 퍼짐성이 약하여 분 바르기 전에 족집게나 실면도로 얼굴의 솜털을 일일이 뽑은 후에 백분을 물에 개어 바르고 나서 잠시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게다가 곱게 발라지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백분에 납을 화학처리 해 부착력이 좋아지고 잘 펴 바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연분의 제조는 화장품 발달사상 획기적인 대발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인들은 또 연지를 만들어 볼과 입술을 치장하였는데, 연지는 홍화(잇꽃)로 만든 것이었다. 또 눈썹을 그리는 미묵(眉墨)도 만들었는데, 나무결이 단단한 굴참나무나 너도밤나무를 태워 그 나무재를 기름을 태울 때 나는 그을음인 유연에 개어 썼다. 이밖에도 신라인들은 향수와 향료를 애용해 남녀노소 구분 없이 향주머니인 향낭을 차고 다니거나 먹기도 했다.
연지는 이미 고구려 때에도 만들어 치장했다는 것이 수산리, 쌍영총 고분벽화 속 여인상을 통해 밝혀졌다.

안면 미백크림, 염색약 애용한 고려인들
신라의 뛰어난 화장문화가 그대로 전해진 고려시대에는 액체 형태의 면약(面藥)과 머리염색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면약은 남녀 모두가 일상용으로 늘 사용한 일종의 안면용 화장품으로 보이는데, 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희게 하기 위한 피부보호제 겸 미백제 화장품으로 요즘의 영양크림과 밀크로션의 중간 상태로 추측된다. 이때에도 가장 널리 사용된 화장품은 역시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백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가지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화장품 제조산업이 한때 주춤하면서 뒷걸음질 치는 듯했으나 제조기술은 한층 뛰어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 한 예로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에서 ‘朝の露’(아침이슬이란 뜻)란 상표를 단 화장수가 발매되었는데, 광고문안의 첫머리가 ‘조선의 최신 제법(製法)으로 제조된 朝の露 화장수는…’로 시작해 조선의 화장품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이 시대에도 백색피부미인을 으뜸으로 쳐 오히려 얼굴이 흴 뿐만 아니라 기미, 주근깨와 흉터가 없으며 투명한 피부, 즉 옥(玉)같은 피부미인을 선호했다. 이를 위해 요즘의 로션에 해당하는 미안수를 사용하고, 꿀찌꺼기를 얼굴에 펴 발랐다가 일정 시간 후에 떼어내는 미안법(요즘의 팩에 해당)을 하는가 하면 오줌세안을 하고, 손쉬운 방법으로는 오이꼭지를 얼굴에 문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옥같은 피부를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규합총서>에 소개된 ‘면지법(面脂法)’을 보면 알 수 있다.
‘겨울에 얼굴이 거칠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새지 않도록 두껍게 봉하여 네 이레(28일) 두었다가 얼굴에 바르면 트지 않을 뿐더러 윤지고 옥같아진다. 얼굴과 손이 터서 피나거든 돼지발기름에 괴화(槐花)를 섞어 붙이면 낫는다.’
또 이 책에는 몸을 향기롭게 하는 법[香身方]과 머리카락을 길고 검고 윤기나게 하는 법[黑髮長潤法]도 소개돼 있다.
뿐만 아니라 <규합총서>에는 여러가지 두발형태와 열 가지의 눈썹 그리는 법, 갖가지 입술연지 찍는 법도 기록돼 있다.
이 시대에는 여자들의 바깥나들이가 쉽게 허락되지 않을 때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방물장수와 화장품과 화장용구를 전문적으로 방문 판매하는 ‘매분구(賣粉嶇)’라는 장사아치를 통해 필요한 화장품을 들여놓고 바깥세상 소식도 듣곤 하였다. 그외에는 전문상점인 종로 육의전의 분전에서 화장품을 구입했다.
대체적으로는 집에서 자가제조해 왔던 조선조 때의 화장품은 개화기 개항과 더불어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신식 화장품과 화장법이 재래 화장품과 화장법을 대체하거나 대치되는 국면을 맞은 것이다.

 

<관허(官許) 제1호인 박가분(사진왼쪽), 조선조 황실에서 사용한 은제분합(사진오른쪽).

 

수입화장품 봇물 속 ‘박가분’ 탄생
개항 초기에는 주로 일본과 중국 청나라로부터 화장품이 유입되고, 1920년대에는 수입선이 유럽(주로 프랑스)까지 확대되어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왔다. 이 수입화장품들은 재래화장품에 비하여 품질과 포장이 우수하고 사용법이 훨씬 간편했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같은 수입화장품의 선풍적 인기는 한면으로는 우리나라 화장품의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가분(朴家粉)의 탄생이다.
박가분은 1916년 포목상인 박승직상점에서 판촉물로 주기 위해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해 내놓은 것인데, 인기가 있자 품질과 포장을 개선해 1922년에 정식 제조허가를 받았다. 이 박가분은 수입외제보다 품질이 다소 뒤졌지만, 재래 백분보다는 혁신적인 상품이어서 전국적으로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관허(官許) 1호인 박가분이 이렇듯 성공하자 이를 본따 성씨를 붙인 서가분, 장가분 등의 유사상품과 미용백분, 서울분, 설화분 등이 쏟아져 나오고, 배달기름(머릿기름), 연부액(미백로션), 유액(밀크로션), 연향유, 밀기름 등이 줄이어 시판됐다.
이 화장품들은 요즘처럼 기능이 세분화되지는 않았지만 제조기술과 포장이 신식 수입화장품을 모방한 것들이어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20년대에 동아부인상회에서 제조 발매한 연부액은 살갗을 부드럽게 하는 대표적인 피부용 화장품이자 용액크림으로 미안수로서 손등약으로 바르라고 하였고, 겨울연부액은 세수한 후 얼굴에, 일한 뒤 손등에, 분바르기 전에, 얼굴 터진 데, 기타 얼굴의 잡병에 바르도록 권하고 있다. 또한 조선부인약방의 금강액은 여드름, 주근깨, 마른버짐, 어루턱이에 특효약이라 선전하였고, 유백금강액은 최량의 미백소로서 세수 후에 한 방울만 바르면 희고 고운 미인이 된다는 등등 복합기능을 강조하였다.
이같이 신문광고를 통해 판매하던 기업규모의 화장품들 외에도 가내수공업 규모로 생산된 상표없는 상품들도 여전히 판매되고 있었다. 시장의 좌판은 물론 손수레 행상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고객이 원하는 양만큼 덜어서 팔았다. 크림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북을 둥둥 쳤다고 해서 ‘둥둥구리므’(구리므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란 말이 생겨났다.
이러한 우리의 화장품 산업은 8·15와 6·25를 겪으면서 위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반면에 수입화장품과 밀수화장품, 미군부대 PX유출품이 범람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에 가서야 다시 소생의 기미를 보여 생산활동이 본격화 됐는데, 바니싱 크림과 백분의 소비량이 급격히 감소한 반면 액상 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연지도 딱딱한 스틱형으로 바뀌면서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해 화장품업계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TIP. 비누
비누는 그 원형을 맨처음 만든 지방이 이탈리아의 사보나이므로 ‘사봉(Savon)’이라 일컬었다. 그후 11세기경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비누제조업이 크게 발달해 마르세이유 비누가 유럽 전역에 퍼졌고, 오늘날과 같은 비누가 만들어진 건 1641년초 영국에서였다. 우리나라에 비누가 전래된 시기는 개항이후이고 널리 보급된 것은 70~8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조되어 사용한 재래 세정제는 풀잎을 태운 재를 빗물에 장시간 담가 두었다가 만든 잿물이었다.
비누가 우리나라에 수입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청·일전쟁 직후에 비누 한 개의 값이 1원(당시 쌀 한말 가격은 80전)이었음에도 불티나게 팔렸다. 값이 워낙 고가여서 부유층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누냄새를 멋쟁이 냄새라고 불렀고, 일부 사람들은 멋쟁이임을 과시하기 위해 비누를 맨 얼굴에 문지르기도 하였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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