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지킴이’에서 ‘노년 행복지기’로

강 지 원   변호사

 


성공한 고령자의 역할 모델 되고파

 

방배동 골목길 안쪽의 건물엔 변호사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은 없었다. ‘강지원 변호사’란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아 한참을 헤맨 뒤에야 미리 일러준 건물의 명칭이 적힌 빌딩을 찾아서 강지원 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제가 갑자입니다. 그래서 지난 60년 하고 앞으로의 인생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그동안 앞만 보고 살아온 세상이라면 이 나이에는 돈벌이 보다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올 1월에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은 아예 접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없어 찾기 힘드셨죠?”
방배동 사무실에서 만난 강지원 변호사의 첫 마디가 더 이상 변호사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회운동가로 청소년지킴이로 활동하며 존경받던 그였기에 태어난 해의 간지가 다시 돌아오는 회갑이란 기점에서 새 방향을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강 변호사의 부연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난 해를 돌아보니 나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디다. 앞만 보고 살다보니 이웃을  돌볼 겨를도 없었지요. 등산 할 때도 정상에 오를 때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하잖아요? 정상에 올라 성취감을 느낀 후 하산 길은 발걸음도 가볍게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산을 오를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됩니다.”
누군가는 ‘인생 이모작’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강 변호사가 그동안 검사, 변호사, 사회운동가로서 인생 1막을 살았다면, 인생 2막은 오로지 ‘봉사하는 삶’이 목표라고 얘기한다. 이전에도 이미 충분히 봉사하는 삶의 대표 주자가 아니였냐고 되물으니 강 변호사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이득을 얻음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동안  제가 돈벌이나 출세 명예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면에선 이기심이 앞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에어컨을 예로 들었다. 에어컨을 틀면 에어컨이 있는 그 안쪽은 시원해지지만 에어컨의 뒷면은 그 열을 고스란히 내뿜어 찜통이란 것을 상기시켜 준다. 에어컨은 그래서 참 이기적인 기계라는 걸 알고부터는 에어컨 사용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실천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올해로 환갑을 맞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재정비하면서 더 이상 돈버는 변호사일은 하지 않겠노라 선언하게 된 것이란다. 그로 인해 후배 누군가의 일감이  없어 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래서 결심한 것이 오로지 봉사적인 삶을 지향 한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봉사적으로 살았다고 평가들을 해주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 눈앞의 삶은 생활인이다 보니 어쩔 수없이 이기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게 강 변호사의 말이다.
“자식들 키우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젠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와 진 것이죠.”
그래서 그럼 모아놓은 재산이 많으냐는 질문을 자연스레 할 수 있었다.
“집 한 채 있습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보통의 부모들은 앞으로 자식들이 살아나갈 걱정까지 하는데 자식은 스스로 커야합니다. ‘돈 돈 돈’ 하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전 고령자모임에 초대되어 갔는데 이런 얘기 하니까 연금이 없어 용돈이 없다고들 합디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집 있으면 역모기지론 하십시오. 그랬더니 집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라에 도움을 청하라 했습니다. 우리나라 그 정도는 되는 나라입니다.”
강 변호사의 인생 늦깎이 새 목표는 우리 사회에 곧 다가올 ‘고령사회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개인으로서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해 고령자들의 바람직한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평등부부로 서로 존중하며 산다
강지원 변호사는 아내인 김영란 대법관과 평등 파트너쉽을 갖고 생활 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강 변호사가 검사 시절, 옆방 검사 시보로 온 김영란 대법관과 점심을 함께하며 결국 결혼하게 된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 첫 판사 검사 커플이다. 또 김영란 판사가 대법관에 임명될 때 아내의 공정한 재판에 방해를 주지 않겠다는 이유에서 강 변호사가  법률사무소 대표직을 그만둔  일화도 있다.
또 강지원 변호사는 자녀교육도 소신껏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 변호사 부부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큼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딸의 교육만큼은 그들의 기준에 맞추기보다는 오로지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들의 자녀가 대안학교 출신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자신들이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길로 가려는 자녀를 보며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평소 강변호사의 생각대로 두 딸에게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그래서 수능시험조차 거부하던 큰딸은 대안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심리학을 접한 뒤, 현재는 일본에서 미디어아트를 공부 중이다. 둘째 딸은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 더구나 강 변호사는 한 번 선택한 길이라 하더라도 진로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열린 생각도 가지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소질과 적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체험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체험하면서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적성입니다.”

자존감이 진짜 행복의 비결
강 변호사는 항상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마음 좋을 것 같고 선한 인상을 준다. 그의 삶의 모습이 바로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60여 년을 살아오며 치열했던 그의 삶에서 어려움이 왜 없었겠냐만, 힘들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제가 자살방지대책위원회 위원장이예요. 평소 그냥 잘 웃고 다니니까 국가에서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자살할 일이 없을 것 같다나요? ”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이게 다 자존감이 없어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내가 비록 이런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런 쪽으로 괜찮은 구석이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최진실 씨를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가진 것이 참 많은 배우였는데.... 자신의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구설수를 견디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감이 생기지만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면 자학을 하게 되고 자살로까지 번진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존감이야말로 참 행복의 원천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농촌에 대한 기대 크다
“IT산업이 발전할수록 도시에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앞으로 농촌으로 수많은 인구가 유입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예상됩니다. 농업은 자연생명사업이고,  먹을거리는 우리의 생명의 씨앗이지요. 더구나 농사는 모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생산해내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삶에 소중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농촌은 여성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농촌 여성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강 변호사는 앞으로 농촌여성 역할이 중요해지리라고 예상한다며 이 땅의 많은 여성농업인들에게 격려의 말을 남겼다.
“땅에서 채취하는 먹을거리야말로 공장에서 생산하는 먹을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상징이 바로 농촌입니다. 농촌의 가치가 높아지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임을 믿습니다. 농촌을 위한 프로젝트도 이미 구상 중에 있습니다.”
강 변호사의 말은 그냥 하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말임을 알기에  농촌의 희망이라는 그의 말, 농촌을 위한 새로운 구상을 펼치겠노라는 그의 말은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


강지원 변호사는
1949년 출생,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행정고시 합격에 이어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검사의 길을 걸어왔다. 2002년 후배 검사들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며 검사퇴임. 여러 가지 사회적인 활동과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와 참신한 행보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 대표 인사다.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어린이청소년포럼 이사장,  장애인 재활을 위한 푸르메재단 공동대표 등이다. 정치엔 관심 없지만 국가발전을 위해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공약 남발을 막아야겠다는 차원에서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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