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힘겨운 무게만큼 희망도 찾아와요”

이경애   개그우먼

 

 개그우먼 이경애 씨의 인생강의가 많은 주부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인간적이고 사람냄새 난다는 평을 받기 때문이다. 개그맨이란 직업은 남들에게 웃음을 주며 사랑을 받는 일이기에 언제나 유쾌한 인생 같지만 개그우먼 이경애 씨의 삶은 유난히 골 깊고 험난했다. 그런 진솔한 인생사가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담담하게 웃으면서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애절하기도 하지만 희망의 불빛도 밝혀준다.

어머니 자살 막던 어린 시절
푸근한 인상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우먼 이경애 씨.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그닥 유쾌한 인생사는 아니었다.
“엄마가 자살하지 못하게 하려고 기를 쓰며 말렸어요. 뒷산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엄마를 끌어내려 살린 적도 있지요.”
불우했던 유년시절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외항선을 타는 생활로 자유로운 성격의 아버지에게 항상 술이 문제였다. 집안 살림은 뒷전이었고 오랜동안 배를 타고 나갔다 집에 돌아올 때의 가방엔 돈다발이 아니라 조개껍데기만 가득하니 집안 살림은 끼니거리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동네의 궂은 일을 혼자서 도맡으며 5남매를 키워냈다.
힘에 부칠 때마다 “내가 이 괴로운 세상을 끝내겠다”며 자살기도만 모두 다섯 번. 그때마다 어린 이경애는  엄마에게 제발 살아달라며 싹싹 빌었단다.“지금도 가는 귀가 아주 좋아요, 엄마 숨소리가 들리는지 자면서도 수시로 확인해야 했던 습관 때문이죠.”
결국 어렵게 장만한 조그만 집도 아버지의 노름으로 날아가고 월세방을 전전하며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낼 만큼 가난의 연속이었다고.
“지금도 대본외우기는 정말 잘해요. 그냥 타고난 암기력이랄까, 그림을 그대로 기억하는 능력이 제게 있어요. 사실 어릴 때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는데....”
나름 외교관이 되고픈 멋있는 꿈을 간직했던 소녀는 꿈이 꺾이자 먼저 돈을 벌어 놓고 그 다음에 못다 이룬 꿈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년 학교를 쉬면서 동생 들쳐 없어 키우며 집안일 해가며 팔도사투리를 연습하면서 개인기를 연구했죠. 잘나가는 아나운서들의 뉴스도 매일 따라하고, 웅변연습도 했지요. 개그맨의 기본기를 그때 갖춘 거지요. 결국 노력하면 안되는 게 없더라니까요.”
지금도 이경애 씨의 인생 좌우명은 “노력하면 된다”이다. 내성적 성격이라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쭈빗거리던 소녀는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자신의 끼를 찾아냈다.
이듬해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고 회사장학금을 받아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행사 때마다 팔도사투리 개인기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결국 1984년 개그맨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한 방송데뷔를 하게 된다.
“어떤 형태로라도 엄마를 위해서 성공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유머일번지’‘쇼 비디오자키’ 등 코미디 프로가 많던 시절이라 승승장구했죠.”
최고의 전성 시대는 유행어 “넌 내꺼야”를 만들어냈던 시절. 아이스크림, 라면 CF등에서 활약하며 수입도 좋았다.

 

<김포 사우농협 문화센터 강의 후 주부들과 함께 했다.>

 

첫 결혼 실패로 세상과 등져
그녀는 참 꾸밈없이 자신이 삶의 흔적들을 들려준다. 다만 첫 결혼과 이혼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편이었는데 어찌됐든 헤어진 상대편과 관련된 말이라 “그냥 내가 이혼을 당했다.”고 정리해 준다.
이혼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고 대인기피증세도 생겨 모든 방송활동을 접고 꼭꼭 숨어버렸다. “예전 성격이 나온 거지요. 그냥 남 앞에 나서는 게 두렵고 힘들었어요.”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고통의 세월을 홀로 보냈다. 슬픈 유년기를 다시 맞은 듯 참혹했다. “첫 번 결혼실패로 세상과 담을 쌓았죠 아무도 만나기 싫었고 이혼이란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웠어요.”
지금 남편은 그저 뒤통수에 반해서 만나게 되었단다. 서로 재혼커플이라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의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는 위기가 닥쳤다. 2000년 무렵, 그녀의 인생 속에 가장 암담한 시절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어머니,아버지,남편이 모두 병원에 입원해서 투병 중이었을 때가 있었어요. 이대로 잠이 들어 눈이 안떠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던 적도 있어요.
이경애 씨의 지극 정성으로 남편은 간 이식수술에 성공했고 건강을 되찾는 감동스토리를 만들었다.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렸다.

마흔 둘에 시험관 아기 성공
아이는 욕심이라 생각했었지만 도전은 해보고 싶었다.  내심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나이줄이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남편의 바람이 너무 커서 힘들어도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 어려운 시험관아기를 갖기로 결심한 것, 그리고 묵묵히 그과정을 견딘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정말 기적이었어요. 나이 마흔 둘에 엄마가 되다니....”
이경애 씨는 아이 이야기를 할 때면 유난히 말소리가 경쾌해진다.
“벌써 다섯 살입니다. 요즘 신종플루 때문에 유치원에 못가고 있어요.”
결혼생활 9년째 접어든 지금,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다. 남편은 간이식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건강을 되찾았고, 욕심인가 싶어 감히 입 밖으로 내기도 어려웠던 아이를 얻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남편이 너무 아이를 싸고 돌아 버릇없단 소릴 들을까 염려될 뿐이다.
개그우먼 이경애는 당당하고 솔직했다. 어린시절부터 참 비좁고 굴곡진 길을 씩씩하게 걸어왔다.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어요 이제 다섯 살인 딸아이와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일도 좀 줄였지요. 매니저도 그냥 만만한 막내동생의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제일 소중한 것은 역시 가족의 건강이겠죠.”
많은 풍파를 이겨내서 그런지 삶의 내공이 담긴 소중한  말을 이렇게 들려준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이럴 때면 그저 이 끔직한 하루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게 되지요. 우리네 인생은 수많은 이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보냅니다. 인생을 얼마나 기쁘게 살고 얼마나 포용하며 얼마나 노력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그것을 견디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가 겪는 시련이 아니라 그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입니다.”
나무가 멋진 가을 옷을 갈아입듯 개그우먼 이경애 씨도 아름답고 고운 빛의 인생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가 우리에게 선사한 큰 웃음을 그녀 자신도 항상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계절이다.


개그우먼 이경애 씨는…
1964년 출생했으며 동덕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KBS 제2회 개그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며 데뷔했다. 1995년 제22회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팔도사투리 구사가 주 특기이며 좌우명은 ‘노력하면 안되는 일 없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