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칼럼

김 재 황
시인
본지 칼럼니스트

 

농촌에는 건강한 뭇생명체들이 산다.
그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은 건강하다.
농촌은 여성이 있어 따뜻하고 정답고
아늑하고 활기차다.

 

산 좋고 물 맑은 곳, 우리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꿈꾼다. 농촌으로 가면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곳에는 온갖 식물과 동물이 멋지게 어울려 산다. 물론, 사람들도 자연의 일부로 살아간다. 그런데 자연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게 여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니, 분명하게 여성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그렇다. 자연은 여성의 세계이다.
그런데 생명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느낌에 있다. 느낌은 동물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식물도 느낌을 갖는다. 예컨대 배롱나무는 그 줄기를 살살 만지면 간지럽다는 듯이 가느다란 가지를 움직인다. 
버던샌더슨(John Burdon Sanderson)은 이렇게 말했다. “파리지옥의 감각모는 건드리고 나서 35초 이내에 다시 건드리지 않으면 덫이 닫히지 않는다. 이로써 식물이 바로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감각모는 다음의 자극이 오기까지 먼저의 자극을 기억하고 있고 시간까지 정확히 잰다.”
그렇듯 농촌에는 건강한 뭇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그러하니, 그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 또한 건강하다.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곤충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의 경우에도 여성이 상위이다. 장끼가 아름다운 깃을 자랑하는 이유도, 까투리에게 선택받기 위함이다.
게다가 개미나 벌의 삶을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의 사회는 여왕들이 지배한다. 일개미나 일벌도 모두 여성들이다. 경쟁이 심한 몇 종의 개미 사회에서는 여러 여왕들이 함께 연합체제를 구성하여 어려움에 대처하기도 한다. 분봉(分蜂)도 멋지다. 딸인 새 여왕과 그 무리에게 자기의 집을 물려주고 난 다음, 어미 여왕은 자기 무리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 지혜가 사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
우리나라는 고려로부터 조선 중기까지 여가혼(女家婚)의 형태를 유지해 왔다. 다시 말해서 강력한 모계의 매트리로칼(matrilocal) 결혼이었다. ‘매트리로칼’은, 가정을 여성 쪽에 차리는 결혼 방식이다. 쉽게 말해서 ‘장가가는 결혼’이다. 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귀여가’(男歸女家, 장가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농촌에 젊은이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은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으므로, 시골에 조용히 파묻혀 있지를 못한다. 아무리 자연이 좋다고 하여도 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특히 남성보다 여성 쪽의 평균수명이 길기 때문에, 농촌에는 나이 든 여성들이 많다. 하지만 농촌의 여성들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다. 늘 유연하게 몸을 움직인다. 유연하다는, 그게 바로 젊음이다. ‘병촉지명’(炳燭之明)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늙어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저녁에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다. 촛불을 밝히고 밤길을 가는 게 어찌 더듬거리며 밤길을 가는 것과 같겠는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서 나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10년 동안 밀감 밭을 가꾼 적이 있다. 그 당시에 그 곳 사람들은 문패도 여성과 남성의 것을 나란히 달았다. 나는 그게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농촌여성의 역할은 도시 여성에 비해 훨씬 무겁다. 농사를 짓는 일도 중요하려니와, 아내로서 할 일도 많다. 또, 어머니로서의 할 일도 크다.
더 나아가서 할머니로서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밤에 할머니에게 듣는 옛날이야기가 아이들을 쑥쑥 자라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농촌은 여성들의 불빛으로 인해 따뜻하고 정답고 아늑하고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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