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음식과 추억, 세 번째 이야기

김 은 미 생활지도관
농촌진흥청 발효이용과

 

추석이면 큰 엄마는 항상 직접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내셨다. 그 시절엔 직접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내는 것이 별 일은 아니었으나 송편만 보면 유난히 큰 엄마가 생각나는 이유는 그 특별한 맛 때문이다.
큰 엄마는 송편 속을 꼭 거피한 팥이나 동부로 쓰셨다. 속을 얼마나 꼭꼭 눌러 채우셨는지 송편 하나하나가 잘 여문 밤톨같이 야물었다. 송편을 찔 때도 솔잎을 듬성듬성 얹은 솥에 쪄낸 후 서로 붙지 말라고 하나하나 기름을 발라주셨다.
금방 솥에서 쪄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송편을 나이 순서대로 줄을 세워 나눠주시곤 했는데 두어 개씩 나눠주는 송편이 감질나 시렁에 올려놓은 송편을 오며가며 집어먹어 차례상에 올릴 송편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 송편뿐이었겠는가. 흑임자, 송화, 콩 등으로 빚어낸 다식, 산자와 유과, 약식, 수정과 등 특별히 우리들이 좋아했던 명절음식들은 넉넉하게 마련하지 않으면 모자라기 십상이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큰 엄마는 떡이며 전이며 산적같이 손 많이 가는 음식들은 미리미리 만들어 동서들에게 가급적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 노력하셨다.
명절이나 제사 때 어머니는 우리들을 먼저 보내고 당신은 저녁 늦게야 큰댁으로 오셨는데 큰 아버지는 뒤늦게 들어서는 제수씨인 우리 어머니를 늘 못마땅해 하셨다.

 


먼저 온 우리들의 인사도 제대로 안 받으시며, “니들 엄마는 뭐하고 니들만 먼저 왔냐?”는 타박을 하시기 일쑤였다.
시어른 모시며 명절과 제사음식 혼자 마련하시느라 늘 바빴던 큰 엄마 혼자만의 분주함을 그렇게나마 위로하고 싶었을 큰 아버지의 마음을 철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무섭고 야속하기만 했던 큰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큰 엄마는 여든의 할머니가 되셨다. 송편 빚는 일을 놓은 지도 오래고 말년에 자식들 때문에 겪은 고생으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쇠잔해지셨다.
가끔 만나는 이 여든의 할머니는 나이도 나이려니와 손맛이 예전 같지 않다. 아픈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앉은 거칠고 주름만 가득한 손으로 무엇을 한들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유년의 기억은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꿈같이 달콤하다. 그중에서도 큰 엄마는 기억 창고 속 가장 빛나는 보물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추석엔 가족들 모두 둘러앉아 큰 엄마처럼 맛있는 송편을 빚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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