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옛날에 선비들이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으레 묻는 말이 있었다.
“관향(貫鄕)이 어디신가?”
즉 조상의 출신지를 묻는 것이다. 관향은 달리 본관(本貫)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람의 출신성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어느 집안의 씨앗이냐’를 물어 그 신분에 따라 대접이 달랐던 것이다.
고대시대에는 대부분 성(姓)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씨의 종류도 적어 동족구별이 어려웠던 까닭에 조상의 출신지에 성을 붙여 본관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성씨를 처음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로 일부 상류계급이 쓰기 시작하면서 차츰 하층계급에 보급됐다. 군현제가 시행되던 때에 향·소·부곡·처(處)·역(驛)·섬 주민과 백정·노비 등의 천민계급은 성씨는 없었으나 신분표시의 의미로 본관은 사용했다. 곧 거주와 신분이 결합된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말 천민 해방운동이 있고나서부터 성씨가 보급되기 사작했고, 성씨를 구별하는 의미로 성씨의 뿌리이자 고향인 본관이 쓰였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고(高)씨다.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부여(扶餘)씨, 신라는 박(朴)씨(혁거세)·석(昔)씨(탈해왕)·김(金)씨(알지) 왕조였다.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은 김씨로 지금 김해 김씨, 혹은 가락 김씨의 시조로 돼 있다. 발해는 대(大)씨(조영)가 문을 열었고, 고려는 왕(王)씨(왕건)가 개국했다.
특히 고려시대부터는 외침이 잦았던 탓에 외래인 (이들을 잡색인이라고 했다)의 귀화정착이 늘어났고, 그들에게 나라 임금이 성씨를 지어 내려주는 이른바 사성(賜姓)이 생겨났다.
그러던 것이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과 더불어 본관을 전주로 하는 이(李)씨가의 세습정치시대가 열리고, 엄격한 신분제도 아래서 성씨의 고향인 본관은 지연과 학연, 인맥을 얽어매는 명줄이 되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호패(戶牌)가 생겨난 것도 조선조 태종 때인 1413년이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4년 원나라에서 전래된 이 호패는 호구와 군대에 복무할 장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시행했던 것인데, 여기에는 직업과 신분계급을 분명하게 적어놓았다.
특히 서민과 외래인, 노비들은 잡목(雜木)에 그 주인의 이름과 나이, 거주지, 심지어는 얼굴빛과 신장, 수염이 있고 없는 것까지 기록해 놓아 제대로 된 호패를 위조하거나 빌려 차고 다니는 범법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의 귀화로 생긴 외래 성씨가 44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이씨, 영도 하씨, 구리 신씨, 귈랑로즈, 고전(古田), 누그엔티수안 등 생소한 성들이 개명하지 않고 원래의 고향이나 이름을 유지한 채로 호적에 올려 우리 성씨에 편입됐다. 그중 중국계가 90%이상이고 일본·몽골·여진·위구르·베트남·필리핀계 등 출신국적도 다양하다. 이제 단일민족이란 말은 고전이 됐다, ‘척화비’를 세웠던 대원군이 지금 지하에서 가슴을 치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