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칼럼

조 동 춘 박사
(사)밝은가정협의회장
본지 칼럼니스트

 

남편이 죽어 장례를 치르는데 아내가 미친 듯이 울며 무덤에 같이 들어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광경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던가.
“아! 저 사람은 남편을 무지하게 사랑하였나보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던가? 아니면 “저 여성이 앞으로 남편 없이 살아 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여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가.
어떤 생각을 하던 그 생각의 기준도 자신의 처지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되겠지만, 굳이 구분을 하라면 사실 후자가 맞다.
남편을 사랑하여 저 세상 간 남편을 못 잊어 하는 것도 모두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없이 혼자 쓸쓸하게 살아갈 생각을 해보라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이렇듯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며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 대부분은 상대를 위해 자신이 희생을 하며 살아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부족한 듯 해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손해 보고 산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 부족한 사람을 만나 짝으로 삼았겠는가? 사실 뾰족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위해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결혼 적령기에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있어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것이다. 인물, 학벌, 집안, 경제력, 직장, 똑똑한 사람 등 누구나 할 것 없이 조건이 더 나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입에 맞는 떡이 어디 그리 쉽던가.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나보다 자기 자신들을 우선으로 여겼다. 그때 나는 심적인 위축이 되어 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그 사람은 날 사랑해주는 정도가 남달랐지만 위에 말한 어떤 조건도 충족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젊음은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를 위해주고, 생명처럼 사랑해줄 남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모한 선택을 한 셈이다.
내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우리 어머니는 ‘가난이 대문열고 들어오면 애정은 창문열고 도망친다.’고 말리셨다. 사랑만 먹고는 못산다는 현실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지금 뒤돌아보니 어머니의 말씀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모두 내 자존심을 한껏 살려가며 결혼생활을 하기위해 이 남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남편의 그늘에서만 살아갈 타입이 아니다. 남편의 가치가 있으면 나의 가치도 챙긴다. 남편은 항상 내가 가는 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길을 잃거나, 실의에 빠질 땐 언제나처럼 가야할 길을 같이 의논해 주었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항상 희망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던 일이 잘못되어 경제적 위기를 두 세 차례나 겪어야 했고, 무시당하고 자존심 짓밟히는 일도 많이 겪었다. 그래도 내 선택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우리부부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부부가 이상적으로 살아가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공통성이다. 같이 살아가려면 통하는 것이 있어야 행복하다. 무엇을 하든 죽이 맞아야 신명이 나는 법이다. 둘째, 독자성이다. 아무리 같이 살아도, 또 공통성이 있다하여도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는 독자성에서 결정된다. 셋째, 보완성이다. 공통성이 있고 독자성이 있어도 보완성이 없으면 부부로서 의지가 되지 못한다. 같이 산다면 남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행복한 나는 누가 만드나.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입에 맞는 떡을 찾지 말고 입에 맞는 떡을 만들어 가는 수고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며 가치를 인정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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