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8주년 기념 에세이집 낸 가수 하춘화

 

‘영감~’소리 못해 혼나면서 불렀던 ‘잘했군 잘했어’
‘하춘화’이름 알린 ‘물새 한 마리’ 가장 애착

 

하춘화는 1955년에 태어났다. 한글을 떼기도 전에 뜻 모를 유행가를 따라 부르다가 만 6세에 가요사상 최연소 음반 ‘효녀 심청 되오리다’를 내며 데뷔했다. 48년 동안 가수활동을 하며 음반 133장, 2500여곡의 노래를 불렀고, 8000여 회의 국내외 공연을 가졌다. 2006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700회가 넘는 자선공연과 사회봉사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가수 하춘화가 여섯 살에 노래를 시작한지 48년, 2년 후면 반세기를 맞는다. 그녀는  그동안의 노래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의 에세이집을 냈다. 책 제목은 ‘아버지의 선물’. 자신의 사업과 정치인생을 뒤로한 채 재능있는 딸의 뒷바라지를 해온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담겼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딸의 홈페이지를 관리할 정도로 딸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가득 담은 책이다.
지난 26일 홍대앞  ‘더 갤러리’에서  책 출간에 맞춰서 앨범, 공연포스터, 상패 등을 모아 자그만 전시회를 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오늘의 하춘화는 ‘아버지 덕분 ’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고 ‘딴따라’로 폄하되던 시절에 아버지는 꿋꿋한 자존심을 가지고, 자식의 타고난 재능을 키워 주는 게 진정한 교육이라 생각하신 혜안을 가지신 분이셨죠. 그래서 오늘날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춘화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녀 노래 인생 48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으뜸가는 공로자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생애 가장 빛나는 선물이자 축복이고 기쁨이 되는 존재라는 것, 부산의 한 중견기업의 고위간부를 지내고 한때는 정계진출을 꿈꾸었던 그녀 아버지가 불혹의 나이에 선택한 길은 바로 딸 하춘화를 최고 가수로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흔이 되던 해부터 노래 잘하는 딸의 재능을 키우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친 분이셨죠. 남자 스타들은 항상 저와 동행하는 아버지 때문에 제게 말 한번 걸기도 힘들었다고 해요. 가요계 활동을 하며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었던 것도 늘 아버지와 함께 했기 때문이겠죠.”
하춘화는 모범연예인으로 자신이 불리우는 것 역시 항상 절제하고 겸손한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아버지한테서 배운 태도라고 얘기했다.

 

 

하춘화의 역사는 대중가요의 역사
그녀의 이번 전시회에 소장품 중에서 음반 100여장과 48년간 모아온 기사 및 사진 자료, 상패 등을 전시했다.  대한민국 가요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소장품들인데, 그 꼼꼼한 정리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모두에는 그녀 아버지의 반평생 딸에 들인 노력과 정성이 배어있다.
“이건 일부분이예요. 십분의 일쯤 될 거예요. 나중에 제 모든 자료를 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 대중예술 연구 자료로 기증할 예정입니다.”
전성기 때는 일년에 11개 음반까지 낸 적도 있다는 그녀다. 지금껏 총 2500여곡을 낸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곡은 무엇일까?
“하춘화란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된 ‘물새 한 마리’라는 곡입니다. 이 곡은 부를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죠. 제일 힘들었던 곡으론 16살 때 불렀던 ‘잘했군, 잘했어’입니다. 상대역으로 고 고봉산 선생님과 같이 녹음을 했는데 아버지뻘 되는 분께 ‘영감~’소리가 안 나와서 혼나면서 녹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과의 인연
48년 가수생활 동안 역대 대통령과의 각별한 사연들도 그녀는 공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기억이 가장 생각납니다. 고 육영수 여사는 노인잔치 행사 때마다 ‘하양, 나 좀 도와줘’ 하며 전화를 주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인자하셨지요. 박근혜 대표가 영부인 자리를 대신하던 시절에 박대통령께서 ‘너도 아버지와 다니느냐, 나도 근혜랑 다니는데’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기억도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제 콘서트에 오셔서 즉석에서 ‘목포의 눈물’을 신청하시는 바람에 반주 테이프도 없이 불러 드린 적이 있구요. 그 인연으로 동교동 자택에 식사 초대 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김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조문을 가서 영전에 국화꽃 한송이를 바치며 추억했지요.”

성형수술 말도 안돼…운동이 비결
군살 하나 없는 몸매며, 커다란 눈동자의 동안인 얼굴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해 성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들도 있단다.
“성형수술에 대한 의심들이 많더라고요?  자신 있게  말하지만 저 아직 자연산입니다. 저녁에 바르는 영양크림이 전부구요. 마사지는 일년에  서너 번쯤, 피부 관리는 앞으로 받을 거구요. 또 앞으로 성형이 필요하다면 할 것입니다. 글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아마 비결은 운동이 아닐까 합니다. 수영, 수상스키, 골프, 볼링 등 운동은 다 좋아하고 심지어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뛸 정도니까요.”

하춘화의 두가지 꿈
어린 시절 바쁜 생활로 중단됐던 학업에 대한 아쉬움은 39세 때 방송국에 근무하는 남편과의 늦은 결혼을 하면서 다시 향학열이 불붙게 되었다.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성균관대학교에서 2006년 박사 학위를 받아 대중가수의 위상을 높였다.
“새벽 한시에 잠들어 5시에 일어나며 고3 수험생 같은 생활을 하며 매달린 성과죠. 물론 남편의 도움과 아버지의 격려가 뒷받침이 됐죠. 꼬박 12년 걸린 성과인데, 늦은 나이에 공부해 시간도 오래 걸렸고 노력도 몇 배나 필요했죠. 독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올해 9월부터 그녀는 이 대학에서 ‘한일 대중음악 비교’ 강의를 맡아 ‘교수님’으로 불리게 된다. 또 하나 그녀의 꿈은 대중음악전문학교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춘화를 아는 사람들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하춘화의 그 꿈 역시 그녀라면 할 수 있다고 내심 믿고 있다. 그녀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꿈꾸고 계획한 일은 차근차근 하나씩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그녀를 쭉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제 도전은 아직 진행형입니다. 대한민국 예술 발전에 큰일을 하고 싶고...2년 후엔 하춘화 노래 50년 기념 콘서트도 해야 하고... 정식 자서전은 80주년 공연 때 쯤 낼까요?” 항상 도전을 멈추지 않는 아름다운 그녀, 하춘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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