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되살리기에 일생 바친 국순당 배 상 면 회장

 

죽어가는 우리 농업·농촌 살려야 좋은 술 만들 수 있어

 

“큰일 났어. 농업이, 우리 농촌이 죽어가고 있어. 농토는 농약으로 피폐해지고, 쌀 맛은 떨어지고… 쌀 맛이 좋아야 나 같은 사람이 좋은 술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니겠소? 허어, 참…”
인사를 건네면서 받아든 신문(농촌여성신문)의 제호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배 회장이 제호의 머리글자 ‘농촌’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노기 띤 얼굴로 넋두리처럼 기자에게 던진 첫마디다.
날이 선 총기를 서늘하게 느끼게 하는 형형한 눈빛과 미수(米壽,88세)를 앞둔 노인의 물리적인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정도의 열정과 힘이 배인 경상도 억양의 우렁우렁한 목소리. 한 그루 우뚝한 거목을 연상케 했다.
연일 계속되는 장맛비가 잠시 주춤하고 후텁지근한 열기가 도심을 달구던 한 여름 오후 3시. 약속된 시간에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배 회장 집무실을 찾았다. 배 회장 자신의 호를 딴 ‘우곡’ 빌딩 현관에 들어서자 오른쪽 벽면에 배 회장이 직접 쓴 한글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힘과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원기를 갖고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여 그 본분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열성(熱誠)>…(중략)…모든 희망과 목적은 엄숙하게 올바른 길을 표준으로 삼아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밝고 명랑하게 통일된 길을 실천하고 오로지 이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할 것이다.’(2005년8월12일)
배 회장 자신의 결의에 찬 마음가짐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글귀다. 회장실은 6층에 ‘배상면주류연구소’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비서실이 딸린 서너평 됨직한 집무실은 한켠 벽면의 일서(日書)들로 가득한 책장과 소박한 4인조 응접소파, 그리고 자신이 휘호한 족자 몇 점이 걸려 있는 정도로 조촐한 분위기다. 건물 현관의 관리인 말에 의하면 배 회장은 매일 아침8시 전후해서 출근해 저녁5시경에 퇴근한다는 것.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거의 매일 출근해 집무실과 주류연구소에서 책을 보거나 손님을 만나고 연구소에서 연구일을 한다는 비서의 귀띔이다.

배 회장이 소파자리를 권했다.
- 건강해 보이십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나이가 올해 여든여섯이요. 몸이 성치 않아. 심장박동기를 차고 있지, 귀도 잘 들리지 않고… 그래도 평생 해온 주류연구 일만은 놓지 않고 지금도 몰두하고 있어요. 사명감 갖고 하는 일이지만 젊은 인재들이 없어 큰일이야. 게다가 요즘 일본식으로 술을 만들다 보니 우리식 술 만드는 법이 다 없어졌지.”
배 회장은 신화시대 우리나라에서 주조기술을 익혀 간 일본 술의 신 얘기가 소개된 <조선주조사> 얘기를 하며 개탄했다.
- 인재는 회장님 같은 분들이 키워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아. 우리 술 주조기술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도 없고, 젊은이들은 취직이 안 되니 이쪽에 뜻을 두는 일은 더더구나 없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쌀을 절약한다 하여 술 만드는 일을 근절시켜 버리지 않았소? 대학의 발효과를 폐지시켜 버린 마당에 어떻게 제대로 생긴 인재가 길러질 수 있었겠나. 술의 기본은 누룩인데, 공장이 전국에 고작 두개 뿐이고, 일본인들은 쌀로 주조하는데 반해 우리는 전쟁 후 ‘미공법480호’에 의거해 들어온 원조곡물(밀)로 술을 만드니 제 맛 나는 우리 술을 만들 수 없었던 거요. 안되겠다 싶어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쌀로 술을 만들게 했는데, 그게 경주법주야. 그나마 주조기술자가 죽는 바람에 맥이 끊겼고 당시 잘 만들어져 나왔던 금복주, 안동소주도 일본식으로 주조방법이 바뀌어 제 맛을 잃었어. 6·25때까지는 알코올 농도가 45도나 되는 독주지만 술맛이 구수한 맛있는 우리 술이 있었어요.”

 

 

길고도 험한 가시밭길에서 우뚝서다
배 회장은 1924년 경북 대구 출생으로 1950년 국립 대구농업전문학교(현 경북대 전신) 농예화학과를 졸업했다. 그 이전 유소년 시절에는 세 번의 중학교 입학시험 낙방, 자의반 타의반의 일본 중·고등학교 유학, 영양실조와 폐결핵, 늑막염 등 질병에 시달리는 등 숱한 좌절과 실의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일어서 주류산업에 온 생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신께서 무한한 지혜를 나에게 주셨다, 감사합니다>에서 이렇게 회고 했다.
‘나는 17~18세 때 미국의 유명한 포드, 카네기, 에디슨 전기와 일본의 강담사(講談社) 창업자 노마 세이치, 주부의 벗 이시카와 다케미의 인생관, 사업관에 심취하며 수십 회 읽는 사이에 사업가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을 항상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후 인생이란 것이 묘한 것인지 대학 때부터 주류공업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평생 직업으로 지금까지도 연구에 투신하고 있다. 그리고 주류업을 하는 50여년간 나로서는 온갖 정성을 바쳤으나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어 다음 대까지 계속 이어져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60세를 바라볼 때였다. 이를 위한 노력의 첫발로 장남(배중호)을 생화학과에 보내게 된 것이고, 차남(배영호)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므로 그의 처를 생물과 출신으로 선택하였다.…이들 둘 모두가 전통주 업계의 대들보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50년 각고 끝에 ‘배상면표’ 쌀막걸리 완성
아무튼 전기로 가동하는 인큐베이터가 없던 대학시절, 사과상자 판자로 항온조를 만들고 참숯불을 지펴 젖산균을 배양하면서 시작한 술공부와 연구가 9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혹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으셨나요?
“왜 없었겠나. 아마 술에 바친 시간과 돈과 노력을 다른 분야의 사업에 쏟았으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큰 성공을 이루었을거요.”
그는 그때의 마음가짐을 앞에 예를 든 자서전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내 자신이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젊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기꺼이 산을 오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끊임없이 활동하며 밤에는 도서관이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위험이나 방해물도 나를 단념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어떤 시인은 자신을 키운 것은 8할(80%)이 ‘바람’이었다고 했던가. 배 회장은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에게 삶의 자양분을 더해준 이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회상했다.
‘최초 나의 스승은 주위 어른들이었고 환경이었을 터이다. 목수일도 하고 대장간을 마련해 놓고 농기구를 만들던 외조부님과 외가댁, 그리고 포도나무와 감나무가 있던 우리 집, 그리고 한시를 즐기시던 조부님,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님, 너무나 순종적이었던 어머니가 나를 가르쳤다. 더욱이 드물게 성실하고 단정한 분이었던 숙부님은 어린 시절 나를 이끈 분이셨다.’
-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 있으신가요?
“요즘 도통 우리 술 제대로 만드는데 관심들이 없어. 정부에서는 술 만드는 일을 우리 농사꾼에게 맡기면 되지 뭐 일일이 간섭하느냔 말이야. 도대체 정의와 상식이 안 통하는 망할 사회야. 외국사람들은 최고의 곡물, 최고의 과실로 술을 담그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반대야. 그러니 제대로 된 맛있는 술이 나올 수 있나?”
- 그런 술 만들어 남기시는 것도 회장님의 여생의 숙원사업이 될 수 있겠군요?
“이미 해놨어. 그런데 자식들이 일반 기술공개를 원치 않아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지.”
배 회장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비서에게 냉장고에 있는 걸쭉한 막걸리 원액을 가져오게 해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전통술의 달인 배상면 회장이 40~50년 각고 끝에 마지막으로 완성시켰다는 13도의 순쌀 막걸리… 그야말로 “쥑인다”였고, ‘우리 술 희망 있음’이었다.
입신(入神)의 경지를 말한다면 경망된 과찬일까….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