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신 홍
본지 편집위원
前 축협중앙회 연수원장

 

인간은 참으로 이중적 가치를 지닌 존재 같다. 겉으론 강한 것 같으면서도 내면을 헤쳐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이다. 또한 천사와 같은 삶을 살던 사람도 짐승과 같은 삶으로 전락하는 예도 있고, 악마와 같은 삶을 살다가도 이를 청산하고 참회하며 성직자의 길을 걷는 삶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토록 사랑을 나누던 부부간에도 돌아서 남이 되고, 천륜으로 맺어진 자식마저 부모를 그저 이용물로 대하는 경우도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내면은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것 같다. 옛날에는 가난하게 살지언정 도둑이 되지 말고, 돈 많은 부모보다 부모님의 올바른 삶을 존경했는데 오늘날에는 돈 많은 부모를 제일로 치는 추세이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그냥 지어낸 말이 아닐진대, 이러한 가치관의 혼돈은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자기 편리만 찾는 데서 기인하는 현상일 것이다.
인간이 이 처럼 목전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덤벼드는 세태를 보면서 조선조 후기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금릉 남공철의 문집에 나오는 ‘나비와 까치’ 이야기가 생각난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자 나비가 그물에 걸려들어 죽는다. 하인이 마당 가운데 낟알을 뿌려놓고 까치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머슴은 하루 종일 까치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나비는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그 향기와 맛을 탐닉하다가 잡힌 것이고 까치는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어 낟알 하나를 먹어도 천천히 그 주위를 맴돌고 곡식 한 알을 쪼고도 한 걸음 물러나기 때문이다. 기침 소리만 들어도 주위를 돌아보고, 사람의 자취가 보이면 그만 날아가 버린다.
까치는 이렇게 소심한 것 같지만 이익을 보면서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탐욕을 무릅쓰면 나비처럼 뜻하지 않은 재난에 걸려들기 쉽지만 이익을 보아도 두려워할 줄 알면 그 화를 면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글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바른 삶을 도모하는데 경계로 삼을 만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삶의 시발점이 된다. 이 처럼 기초가 되는 깨끗한 마음이 없으면 앞의 이야기에서 본 나비처럼 자칫 무너지는 삶을 살기가 십상인 것이다. 당장 보기엔 좋은 삶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좀 궁핍하고 힘들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오히려 좋은 삶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편, 세상엔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도 가끔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본바탕이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일종의 감정 과시에서 오는 것이므로 그 것이 아름다운 삶으로 미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말에 ‘소심하다’는 말이 있다. 사전적 풀이는 대담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뜻의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중국어에서는 ‘소심(小心)’이 ‘조심하다’ ‘주의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무릇 매사를 도모함에 삼가는 마음을 지니고 눈앞의 시련을 더 큰 도약의 계기로 만드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정작 닥칠 지도 모를 피해를 미리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과 내 삶을 향상시키려는 꾸준한 노력이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꿀을 탐닉하다 꿀 속에 빠져 죽는 경우를 흔히 본다. 무모한 욕심으로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큰 꿈과 희망을 가지되 수분자족(守分自足)할 줄 아는 소시민(小市民)의 삶은 그래서 더욱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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