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황 선 미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표>로 대표되는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동화작가 황선미. 햇살 푸른 오월의 싱그러운 꽃그늘에서 만난 그의 유년시절과 사춘기는 가슴 시린 가난이 전부였다고 했다.
‘어른이 되었어도 내 글은 유년을 근거로 출발하여 낯선 것들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자라지 않는, 자라고 싶지 않은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동화를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나에게 동화는 삶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며, 아이들과 더불어 나 또한 성장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삶을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써 동화를 쓴다는 그가 맑은 동심을 길어올려 아이들을 감동시키는 그 무한한 상상력의 원형질은 무엇일까. 안데르센이 백조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오리를 상상했듯이 오리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암탉을 상상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촌스러운 단발머리 소녀
1963년생이니까 올해 마흔일곱이다. 이젠 원숙한 중년에 든 그가 기자에겐 늘 촌스러운 단발머리 시골여학생으로만 기억돼 십여년 전 겨울 초입에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는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때 그는 자전적인 이야기인 <내 푸른 자전거>라는 첫 동화집을 내 D일보에 대문짝 만하게 책과 작가소개 기사가 났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그야말로 극적으로 약속이 이루어졌던 터였다. 그때도 조금은 커보이는 듯한 잿빛 체크무늬코트를 입은 모습이며 머리 매무새가 그닥 세련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특유의 느릿한 것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운 가는 목소리는 변함 없었다. 그때 첫마디가 그랬다.
“어머, 선생님! 살이 많이 찌셨네요.”

 

황선미 작가의 근작들

 

가슴시렸던 가난에의 기억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30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그때 첫 직장이던 신문사 기자를 때려 치우고 고향인 평택으로 내려가 지인의 소개로 중학과정의 직업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내가 담임을 맡게 된 2학년 학생이었다. 그 학교 학생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 적령기를 놓친 나이 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역시 또래친구들보다는 한 두 살 나이가 많았다.
기실 학교 때 그에 대한 기억은 그닥 많지 않다. 달리 말하면 그저 평범한 학생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글 재주가 썩 뛰어난 편도 아니어서 시나 산문 등의 글쓰기를 시키면 입상권에 드는 아이는 늘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 그 황선미가 오늘날의 최고의 동화작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예사롭지 않은 당돌해 보이는 둥근 얼굴과 눈빛, 그리고 뚜벅한 걸음걸이 정도가 기억의 전부다.
그는 그 시절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후기에서 이렇게 그렸다.
‘객사리(평택시 팽성읍 소재의 마을이름)는 여전히 길가 동네다. 객사리의 삼거리는 어렸을 적 나에게 큰길, 작은 길, 사잇길, 구부러진 길 등 모든 길이 퍼져 나가는 중심이었다‥‥(중략)‥‥삼거리에 아직도 스러질 듯 위태로운 자전거포가 있어서 늘 가슴이 시리다.  지금은 주인없이 비어 버린 자리, 아버지가 부둥켜 안고 살았던 가난한 자리. 모든 것이 다 변했어도 그 자리에 자전거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내가 깨닫지 못한 무엇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 거다.’
나중에 그를 취재했던 기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가슴을 턱 막히게 했다. 태어난 고향 홍성에서 빈손으로 가족을 이끌고 평택에 이주해 온 그의 아버지는 허름한 자전거 수리점을 동네 모퉁이에 냈고, 그의 어머니는 생선행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학교에 낼 월사금이나 학급비 등을 어머니가 건네줄 때면 지폐에서 나는 생선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그 물에 지폐를 담갔다가 건져 마른수건이나 다리미로 물기를 말려 학교에 가져가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가난도 가난이지만 남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는 근성이 그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것이 오늘날 그가 최고 동화작가로서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게도 한 커다란 원동력이 된 듯도 싶다. 그가 가난 속에서도 중학과정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정규 인문계 여고(평택여고)에 진학하고, 대학(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와 대학원(중앙대예술대학원)을 마치고 석사학위 수취 후 대학강사로 출강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도 그러한 맥락에서 그의 지난하고도 고달픈 역정과 성취욕, 그리고 목표를 향한 쉼없는 열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정신적 후원자, 아버지
그런 그가 있기까지 또 한 사람의 묵묵하면서도 든든했던 정신적 후원자는 바로 아버지 였노라고 그는 말했다. 다시 앞서 살펴보았던 작가후기를 보자.
‘말기암 환자였던 아버지를 지켜보는 고통 속에서도 이 작품(마당을 나온 암탉)을 썼고, 글쓰기의 즐거움으로 행복했던 게 사실이니, 이렇게 생겨먹은 나 자신에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다. 초고가 완성된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덜 자란 채 남아 버렸다. 이제 내 몫이 되어 버린 고단한 자리, 바다로 가는 길과 미군부대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 그 가운데 혹은 그 어디쯤 내가 서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는 지금 세무공무원으로 있는 중학교 적 옆동네 동창생과 결혼해 아들 둘을 두고 있으며 수원에 살고 있다. 그는 최근 동화집 <고약한 녀석이야>를 내고 글쓰고 강의하랴, 사람 만나랴 여전히 바쁜 일상을 쪼개어 가며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여전히 천착하는 그의 문학의 원형질은 <마당을 나온 암탉>주인공 잎싹의 입을 빈 이해와 사랑이다.
“어리다는 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황선미는‥‥

196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평택에서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보내고 서울에술대학 문예창작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단편 ‘구슬아, 구슬아’로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을, 중편 ‘마음에 심는 꽃’으로 농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제1회 탐라문학상(동화부문)을 수상했고, <내 푸른 자전거><앵초의 노란집><여름나무><샘마을 몽당깨비><나쁜어린이표><목걸이 열쇠>등의 동화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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