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신 홍
본지 편집위원
前 축협중앙회 연수원장

사마천이 인류가 자랑하는 역사서 사기(史記)를 근 20년에 걸친 각고 끝에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관(史官)으로서의 투철한 의식과 아버지의 유언도 있었지만 그 결정적 계기는 사마천에게 운명적으로 몰아친 횡액(橫厄)과도 같은 커다란 치욕(恥辱)이었다.
이른바 ‘이릉(李陵)의 화(禍)’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그와 함께 공부한 동문인 이릉이 흉노족과 전쟁을 치렀으나 열세(劣勢)로 패하게 되었다. 이때 패전 소식을 들은 한무제(재위 BC141~104)는 노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무제에게 아첨하려고 모두 이능을 엄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문수학을 한 사마천은 그의 사람 됨됨이와 그릇의 크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를 적극 변호했고, 그러다 감옥에 갇히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50만전 정도의 거액을 조정에 바치거나 또는 궁형(宮刑-거세)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마천은 돈이 없어 궁형을 당하던지 아니면 자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당시 사대부들은 궁형을 당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으로 여겨 차라리 자결을 택해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곤 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옛날의 역사를 보면 벼슬길에 오른 양반이거나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거나 간에 본인이나 가문의 명예를 몹시 중요시 했다. 양심에서 우러나는 명예를 지키는 것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명예를 지키는 것에 더 힘을 쏟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엣날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겉으로 나타난 명예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서슴없이 먹물을 뒤집어쓰고자 한다. 사마천이 스스로 뒤집어쓴 깨끗한 먹물과 요사이 우리주변에 나라의 지도자였던 인물들이 뒤집어 쓴 더러운 먹물을 대비해 보고픈 마음이 든다.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던 사마천이 왜 그렇게 치욕적인 궁형을 택했을까? 사마천이 그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 그 이유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죽음은 어느 때는 태산보다 무겁고 또 어느 때는 새털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아까워하는 겁쟁이이기는 하지만 거취진퇴의 도리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더러운 흙 속에 갇힘을 굳이 마다하지 않은 것은 나의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것과 이대로 세상을 뜨면 문장(사기)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치욕을 승화시켜 자신을 살리고 가문의 영광을 되찾고 인류사에 등불을 비춰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지난 3월에 야구와 피겨로 마음껏 박수쳤고 한국인의 긍지를 느꼈고 행복했었다.
그러나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4월 들어 우리는 또 더 할 수 없는 자괴감(自愧感)을 맛본다. 도덕성만이 앞세울 무기라고 그렇게 떠들던 정권이 짐작은 했으나 역시 양두구육(羊頭狗肉)이었다. 비리가 터지면 지금까지 보아온 공통점은 처음으로 하는 말이 우선 전면 부정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끌려가면서도 이상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억울하고 기가 막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께다. 사마천이 살았으면 이렇게 주문할지도 모르겠다.
“사내답게 죄를 제대로 국민 앞에 털어 놓고 석고대죄하고 큰집에서 죄값을 치르고 나서는 나머지 평생을 치매노인을 돌보고, 호스피스병동에서 목욕봉사를 하면서 꺼져가는 한 생명 아픔 달래며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러면 당대의 치욕이 후대에 가문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그리되면 백성들의 응어리진 마음도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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