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 주 영

 

고희의 나이에도 ‘문학의 바다’를 항해하며
귀항지에서의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2009년 4월6일 월요일, 경기도 수원의 농촌진흥청 대강당에서 <소통과 창의력>이란 주제로 전직원 대상의 특강이 있던 날, 연사로 나선 소설가 김주영(金周榮·71)씨가 강의 중간에 “내 나이가 올해로 일흔하납니다…” 하자 와-하는 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설마-하던 의구심이 감탄과 놀라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일흔 하나라는 물리적 나이가 가늠이 안되는 건강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한때 가치와 명분에 대한 의구심으로 도리질 하며 꺾었던 펜을 잡고, 여전히 불을 밝히고 ‘문학의 도저한 바다’를 큰 흔들림 없이 항해하고 있다.
그래서 ‘노익장’이란 말은 그에게 있어서는 참 가당치 않아 보인다.
그가 ‘문학의 바다’에서 보는 건 무엇일까?


감수성 자극한 처절한 가난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문단 데뷔 직후에는 도시적인 준수한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문단의 변방을 겉돌며 GI문화가 넘실거리는 이태원의 한 건물 지하에 자리한 ‘미완’이라는 작은 출판사 입구에 딸린 방에서 낮은 촉수의 스탠드 불을 밝히고 글을 쓰고 있었다. 한 일간지에 연재중인 ‘화척(禾尺)’이란 소설이 주목을 받고 있던 때였다. 물론 이미 그 이전에 발표한 대하소설 <객주(客主)>와 <활빈도><천둥소리>로 역사소설에 관한한 우리시대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올라 서 있을 때이기도 했다.
보부상, 도적, 빈농, 창부들의 질박한 삶을 걸죽한 비어와 속어로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그에게, 독자들은 그의 외로운 어깨를 토닥이듯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었다. 그때 가난했던 촌에서의 유년시절 얘기가 오가자 180센티미터의 키에 70몇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진 그가 덩치와는 아랑곳 없이 어린 아이처럼 탈탈 웃었다.

참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내셨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그것이 선생님 문학의 자양분이 됐을 것 같고요.
“그랬지. 월사금(매월 학교에 내던 수업료)을 내지 못해 집으로 쫓겨오고, 도시락을 싸가는 건 꿈도 못꿨지. 배는 고픈데 산골의 해는 왜그렇게 긴지… 밑창 떨어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책을 헝겊보따리에 싸서 어깨에 메고는 비가 오면 비료포대를 ‘ㄱ(기역)’자로 잘라 머리에 뒤집어 쓰고는 냅다 뛰었어. ‘빤스’가 어디있어. 그냥 맨 바지가 팬츠이자 외출복이었던 셈이지.”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는 배고픔과 헐벗음, 업신여김으로 점철된 그의 가난은 꽤 훗날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그런 가난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의 화신처럼 거칠게 날품팔이로 자식들을 길러낸 문맹의 어머니는 유별난 감수성을 지닌 그에게는 늘 벽이었다고 했다.
“교육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살며 억척으로 우리 형제들을 키우고 있던 어머니가 그러셨어. 이빨 앙물어도 돈 안되는 그놈의 소설을 왜 쓰냐고. 그때는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했지. 솔직히 환갑을 훨씬 넘기고서도 내가 왜 소설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어렵다는 생각에 갈등 많이 했어. 그래선 한 때 붓을 꺾은 것인지도 모르고…”

 

‘열심히!’가 내 삶의 좌우명
그는 지금으로 봐서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네살에 결혼하여 자식 셋을 두었는데, 그의 식솔들에게는 단 한번도 배고픈 설움을 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1종 자동차운전면허를 소지하고 있는 기술자(?)라는 사실도 그의 가족들을 가난에 몰아넣지는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혹시 남다른 좌우명이라도 있으신가요?
“좌우명은 무슨…. 그냥 ‘열심히!’살자는 거지. 열심히 열심히 살다보면 뭔가 되지 않겠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소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게 필요해. 사소한 모든 것들은 다 소중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거지.”

요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주시죠.
“말도 안되는 TV드라마 코박고 보지 말고 책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 그런 가운데서 창의력도 나오는 거지. 미국의 유명한 흑인여성앵커 오프라 윈프리도 아홉살에서 열네살까지 삼촌과 사촌에게 성폭행 당하고 미숙아를 낳은 미혼모였던 불우한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준 건 책이라고 했지않아. 책 속에 길이 있지. 난 그렇질 못해 후회스럽기도 해.”
그는 요즘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와 우화집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의 고향인 경북 청송군에서는 그의 작품이름을 딴 ‘객주문학관’을 건립해 그의 ‘키높은’ 문학인생을 기리기로 하고 이미 부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그는 몇해전 모 신문에 쓴 ‘자유는 나의 숙명, 고통은 나의 벗’ 제하의 글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소회를 털어놨다.

‘궁핍 혹은 상대적인 빈곤으로부터 속시원하게 해방되고 있음을 알았음에 대하여, 세금 낼 것을 거짓 신고하지 않았음에 대하여, 비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누구든 비판할 수 있는 배포에 대하여, 분수 이외의 것을 넘보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현란한 세상 위에 놓여진 허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슴 에는 심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도 무한한 명분과 기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음에 대하여, 사랑할 수 있음에 대하여,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가슴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음에 대하여, 남이 웃고 있을 때 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남의 글에서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낯선 나라 낯선 땅 낯선 마을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촌부의 눈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음에 대하여 나는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출생으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나온 뒤 1971년 소설 <휴면기>로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객주><활빈도><화척><천둥소리> 등의 역사소설과 <목마위의 여자><거울 위의 여행><땟국><홍어> 등이 있다. 제6회 대산문학상(소설부문), 제2회 이무영 문학상, 제5회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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