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가수 윤 수 일

 

세상과 어울리게 한 노래는 ‘마음의 고향’
‘혼혈아동’, 다문화가정 후원에 적극 앞장서
황홀한 컴백…25일부터 전국 투어 콘서트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아파트’는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가요로 노래방 애창곡이다. 특히 대학가, 스포츠 경기 등 응원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가요로 세월이 지날수록 그 인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1980년대 꽃 미남의 원조로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걸친 채 마이크 대를 잡고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던 가수 윤수일. 장발 단속과 대마초 파동 등으로 그룹사운드가 급격히 와해되던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록이면 록, 트로트면 트로트, 댄스면 댄스, 작사에 작곡까지… 그 모든 분야를 소화하며 30여년 동안 정상급 인기가수로 군림해오고 있다. 혼혈인으로 태어나 유년기 방황의 시간을 보낸 그지만 이제는 자신과 같은 혼혈아동, 다문화가정을 위한 후원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강인한 어머니의 이북식 자식사랑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 보통 이북 분들이 피난 내려와서 살다보면 강해지잖아요. 그분들처럼 어머니도 강력한 정신력을 가지셨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저를 키우셨어요. 그 당시 미군들이 많은 혼혈아를 만들었는데 그 수습을 미국정부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강제 입양을 시켰어요. 쉽게 말해서 다 거두어들이겠다는 건데 장교들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거의 부모와 실랑이를 해서 반강제적으로 미국으로 보냈죠. 저희 어머님도 수차례에 걸친 미군의 설득과 강요가 있었지만 다 물리치셨어요. 저에 대한 애정이 강하셨고 호적에 올리고 공부도 시켜야했기 때문에 양부를 만나서 저를 하나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어 주셨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듯싶은데…
-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셨지만 한편으로는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나약한 여자였죠. 친부에게 상처받은 뒤 겪었을 슬픔은 여자로서의 아픔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양부에게 여자로서 많이 의지하셨죠. 저 역시 나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양부를 친아버지 이상으로 모셨고, 양부도 저를 친아들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어요. 하지만 양부가 일본 북해도 탄광에 끌려가셨다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한 분이셨기에 경제적으로 생활이 힘들었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정말 운 좋게 가수에 입문을 하니까 어머님이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께 호강을 좀 해드릴 만하니까 데뷔와 함께 암 선고를 받으시더라고요. 어머니께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는데 추운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분이라 그런지 체력이 암을 이겨내실 정도셨죠. 6년을 거뜬하게 사시고 1986년에 암이 아니라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혼혈은 장애가 아니다

어린 시절 혼혈이라는 것 때문에 힘들지 않았는지?
- 제 자신에 대한 상황을 5, 6살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주변으로부터 받는 시선을 통해 평범한 삶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의 관심거리와 구경거리가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폐쇄적인 아이로 변해 갔어요. 성장하면서 ‘어디로 가야 하나’가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것이 해법이 되었죠. 이질감으로 나를 바라보던 친구들이 내가 음악을 하고 기타를 드니까 내 곁으로 모여들었어요. 또한 어머니의 설득과 타이름이 저를 바른길로 인도했죠. 어머니는 미국으로 저를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해 서로 함구하자고 하셨고, 중요한 것은 현재이니 과거는 다 잊고 용서하자고 하셔서 다신 아버지 이야기는 묻지도 않고 하지도 않았어요.

다문화가정, 외국인 노동자 후원에 적극 앞장서고 있는데…
- 지난해 혼혈 가족인 다문화가정에 대해 우리 사회의 따뜻한 시선을 권하는 ‘사랑은 국경을 넘어’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외로움을 담은 ‘코리안 드림’이란 노래가 실린 헌정앨범을 선보였어요. 우리 농촌의 40%가 다문화가족이란 얘기를 들었어요. 외국인 근로자들의 유입도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의 벽은 여전히 높죠. 제 노래가 외모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있는 그들의 삶에 조그만 위로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기획하게 됐어요.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일들을 제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시대적 의무나 책임으로 여기고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데 까지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문화가정에게 당부내지 격려의 말 부탁한다.
- 1970년대까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혼혈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이제 다문화에서 오는 ‘차이점’을 이해하고 배려해야하죠.
이제 다문화사회로 변화되어가고 있잖아요. 저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친구들이 받는 고생도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가리라고 봅니다. 이 땅의 현실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필요한 사람이 되면 더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인즈 워드처럼 미국이라는 큰 전쟁터에서 한 분야에 일등을 해 온 국민이 박수 쳐주고 그랬던 것처럼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더불어 일부이기는 하지만 외국인 신부를 맞이 해놓고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박대하고, 폭행하고 그래서 그들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은 창피한 일이죠. 다문화를 끌어안아 국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노래로 세상과 소통 시작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 혼혈인으로 그 당시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군대도 갈 수 없었어요. 그때는 조직에 들어가서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죠. 설사 제가 공부를 잘해서 뭐가 된다고 해도 결격사유가 많다는 것을 어렸지만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탈피하면서 뛰어넘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춘기와 성장기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스포츠나 예술하고는 제가 잘 맞더라고요. 음악선생님께 상의도 드리고 지금도 연락을 드리는데 제가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노래 부르는 것을 보시더니 가수의 길을 조언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죠.

데뷔곡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대히트를 쳐 인기가수가 되었는데?
- 1977년도는 그룹음악이 가장 꽃을 많이 피운 전성시대라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많이 개최됐어요. 골든 그레이브스(Golden Grapes)라는 그룹의 제일 막내로 출전을 하여 좋은 성적을 거뒀죠. 그것을 기회로 안치행 작곡가가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곡을 써서 제게 주었어요. 비틀즈에 빠져있던 저로써는 트로트인 그 노래가 썩 내키지 않았죠. 제가 그때 21살이었는데 어차피 대중가수의 길을 걸어야하고, 가사 중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운 줄 알았다면… 그 시절 그 추억이 또다시 온 다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란 대목이 저를 결정짓게 했죠. 그 가사가 어머니를 생각나게 만든 거예요. 혈혈단신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미 공군 조종사와 사랑해서 낳지 말아야할 저를 낳고, 아버지는 나 몰라라 미국으로 가버리고. 그런 어머니의 러브스토리와 이 노래가 그야말로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 거죠.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아파트’란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노래를 1982년에 직접 작곡했는데?
- 대중가요가 시대를 대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1982년 당시 화두가 되고 있는 ‘아파트’를 가지고 노래를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외국공연을 다니는데, 사실 외국에는 아파트들을 참 아름답게 지어요. 강변에, 숲 속에,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는 그런 아파트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파트 짓는 것을 보면 사실은 좀 삭막하죠. 그래서 아름다운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집약되면서 그 내용 자체는 러브스토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의 러브스토리가 아주 서글프더라고요. 군대 갔던 친구가 휴가를 나와서 애인이 사는 아파트의 벨을 눌렀는데 소리 소문 없이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는 속상할까봐 말도 못하고 그냥 떠나버린 그런 이야기와 하소연을 듣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바로 만들었는데 10분도 안 걸렸어요. 번뜩이는 것이 생기면 금방 이뤄지잖아요.

 


전국에 울려 퍼지는 ‘청춘일기’

전국 투어 콘서트가 언제부터 시작되나? 
- 오는 25일 오후 7시 경기도 고양아람누리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창원, 대구, 포항, 광주, 대전 등 10여 곳에서 공연해요. 이번 순회 무대의 주제는 ‘청춘일기’입니다. ‘아파트’, ‘황홀한 고백’, ‘제2의 고향’, ‘사랑만을 않겠어요’ 등과 당시의 유행 춤을 선보일 계획이에요. 지난해 방송복귀와 신곡발표, 에세이집 발간 등으로 1년을 마무리하고, 연초부터 공연준비에 몰두했죠. 깜짝 놀랄 퍼포먼스 등도 마련 중입니다. 특히, 이번 전국 투어 수익금 일부는 다문화 가족과 소외된 혼혈아동을 돕는데 사용할 계획이에요.

지난해 유람선에서 이색 컴백무대를 선보였는데, 이번 콘서트에서는 어떤 무대가 준비되었는지?
- 공연을 앞두고 가수 손담비씨의 ‘미쳤어’ 안무를 연습하느라 힘들어요. 예전 ‘황홀한 고백’의 목 꺽기 춤보다 ‘의자춤’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특히 긴 다리를 일자로 들어 올릴 때가 가장 어렵죠. ‘의자춤’ 외에도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에요.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 춤까지 가미해 기존의 콘서트를 탈피한 흥미 있고 볼거리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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