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251)

어렸을 적, 해가 떨어지면 잠 잘 일밖에 없었던 깜깜한 시골 촌구석에서 맨 먼저 문명 세상을 만난 건, 순전히 가설극장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제대로 된 극장은 40리 밖 읍내에나 있었고, 방학이나 겨울 농한기 때에 가설극장이 요란스럽게 동네에 들어왔다.

동네에서 제일 넓은 마당을 빌려 빙 둘러 나무말뚝을 박고, 우중충한 광목휘장을 둘러친 뒤, 스크린과 영사기를 설치해 놓고 밤중에 입장객을 받은 다음 촤르르르~ 영화를 상영했다.

난생처음 이 가설극장에서 숨죽이며 본 영화가 1959년 개봉된 <가는 봄 오는봄>(권영순 감독)이었다. 당대 인기배우였던 최무룡, 문정숙, 전계현이 출연한 영화였는데, 특히 아역으로 나왔던 전영선이란 여배우와 최숙자란 가수가 부른 주제가는 커가면서도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이태 뒤, 앞마을 공터에 들어온 가설극장에서 본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영화 <성춘향>(신상옥 감독, 김진규-최은희 주연)도 가설극장의 추억을 더해줬다.
그렇게 여리고 호기심 많았던 시골소년의 감성을 영화에 흠뻑 빠지게 만든 건, P읍내로의 중학교 진학이었다. P읍내에는 개봉극장 한 곳과 재개봉 극장 한 곳해서 두 개의 영화관이 3~4일 마다 프로를 바꿔가며 영화를 상영했다.

흡사 물 만난 고기처럼 ‘미성년자 관람불가’도 가리지 않고 갖은 수를 다 써가며 읍내 사는 친구 둘과 프로가 바뀔 때마다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이 무렵, 소위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던 ‘꽃같은 누이들’-윤정희, 문희, 남정임, 그리고 고은아가 출연한 데뷔작들을 모조리 봤다.-문희(1965년 이만희 감독 <흑맥>), 남정임(1966년 김수영 감독 <유정>), 윤정희(1966년 강대진 감독 <청춘극장>), 고은아(1965년 정진우 감독 <란의 비가>).

서울로 고교진학을 해서는 여러 가지가 낯설어 영화관 가는 게 어려워졌고, 하숙집 안방에서 보는 TV 드라마와 ‘주말의 명화’가 비록 흑백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허기를 달래줬다.
서울에서 제일 처음 본 영화는, 고1 때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시켜준 윌리엄 와일러 감독, 게리 쿠퍼 주연의 70밀리(mm)대작 <우정있는 설복>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70밀리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대한극장 구경을 했다.

지난 날 <벤허>, <닥터 지바고>, <사운드 오브 뮤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대작영화들을 돌리며, ‘국내 유일의 70밀리 대작상영관’이란 명성을 쌓아온 그 대한극장이 최근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 등 대기업 멀티플렉스와의 경쟁에서 밀려 아침 시간대의 조조할인도 오후 1시로 옮겨가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문을 닫은 국제, 단성사, 명보, 서울, 중앙, 스카라, 국도, 피카디리, 아세아 등과 더불어 ‘10대 극장’의 첫손에 꼽던 대한극장이 홀로 남아 생존투쟁의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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