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233)

- ‘한양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용산호가 있다. 옛날에는 한강의 본줄기가 남쪽 기슭 밑으로 돌아들어와서 십 리나 되는 긴 호수였다. 서쪽 염창(염창동)의 모래언덕이 막아 물이 나가지 않아서 그 안에 연이 자랐다. 고려 때에는 가끔 임금의 수레가 여기 머물면서 연꽃을 구경했는데, 한양(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로는 조수가 갑자기 밀려들어 염창 모래언덕이 무너지면서 바닷물이 바로 용산까지 들어오니, 팔도의 화물을 운반하는 배가 모두 용산에 정박하게 되었다.’

조선조 후기인 1751년(영조27) 전국 8도를 발로 답사한 후 쓴,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의 인문지리서 《택리지》에서 용산을 얘기한 대목이다.
이어서 그는 “지리환경을 논하려면, 먼저 물길(수구)을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 그리고 흙빛과 물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했다. 즉, 자연과 사람이 풍수학적으로 완전히 하나되는 땅을 ‘좋은 삶 터’로 꼽았다.
그러면, 유난히 가파른 언덕 지형이 많으나 부자들이 많이 살고, 한강의 큰 물줄기가 곁으로 휘돌아나가는 용산은 과연 어떤 삶 터 일까.

# 우리나라 근현대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용산이다. 영욕이 점철됐던 ‘눈물의 땅’이다.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 해 얻은 이름이 용산이다(백제 기루왕 때인 서기 97년). 행정구역으로 처음 정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896년으로 구역명은 ‘한성부 용산방’이다. 광복 후에는 용산구역소-용산구로 개칭됐다가 1946년에야 비로소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됐다.

특히, 일제 때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우고, 한반도 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강 물길이 바로 닿는 ‘한성의 관문’ 용산은, 자연 한강에서 활약하는 경강상인들의 활동 본거지가 되고, 당시 국내 최대규모의 용산청과물시장도 생겨났다.(지금 그 자리엔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섰다.) 더불어 통상(상업)활동과 선교활동을 하는 프랑스, 중국, 일본 등의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서빙고동 일대 80여만 평의 땅은,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77년간 ‘서울 속의 작은 미국’으로서 치외법권 지역인 ‘드래곤 힐(Dragon Hill)’로 불렸다. 지금은 ‘용산가족공원’이 됐다.

# 이제 용산 삼각지 국방부 청사에서 새 정부가 출발하면서 새롭게 ‘용산시대’가 열렸다. ‘권위주의적-제왕적 권력의 상징, 구중궁궐, 불통의 본산’으로 불리던 청와대는,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태원 관광특구를 안고 있어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 6.25전쟁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이 보금자리 틀고 대를 이어 살아가는 ‘해방촌’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품어 안고 있는 곳, 다리(한강대교, 한강철교), 철도, 지하철이 모두 모인 교통의 중심지이자 서울의 관문인 용산에서, 이제 새로운 정치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발은, ‘한 마리 용’을 위한 나라가 아닌, ‘국민을 위한, 국민의’ 새 나라 새 시대로 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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