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69)

"집착했던 수많은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60살이 넘어서야
여러 가지 깨달음이 왔다."

아침 5시, 창문에 비치는 여명이 오늘도 새날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새소리가 청아하고, 앞집 하우스 안 수탉이 홰를 치며 목청껏 울어대는 소리는 ‘어서 일어나라고, 날이 밝았다’고 재촉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구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실상 벌레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 여명이 밝아 올 때인 것 같다. 텃밭 채소들을 배불리 먹고 나비로 부화하려는 벌레들은 아침 일찍 잎들을 뜯어 먹고, 해가 뜰 때쯤은 흙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며 사람과 새들의 눈을 피한다. 

농촌의 하루는 동녘이 어스름 밝기 전부터 두런두런 소란해지기 시작한다. 초저녁에 잠드는 나도 4시부터 깨어서 창문이 밝아지나 몇 번이나 내다보며 하루일과를 그려본다. 새벽공기가 아직은 쌀쌀하니 조금 더 밝아지기를 기다려서 강아지 ‘온이’(닥스훈트)를 산책시키고, 꿈밭 농장으로 출근해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차나 삶은 계란, 빵이나 누룽지 삶은 것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고, 하루 일 양을 해본다.

아침은 조금 가볍게 먹고, 이른 점심을 식당에 가서 맛나게 먹고, 저녁은 집으로 돌아와서 편하게 넉넉히 먹는다. 저녁을 가볍게 먹어야 하는데, 저녁시간이 여유가 있으니 저녁을 늦게 먹고, 소화도 되기 전에 잠들어서 뱃속에 가스가 찰 때가 많은데, 이 일상이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나면 식곤증과 피로가 몰려와서 눈이 가물가물... 저녁에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는 폭풍 졸음이 몰려온다.
대처(大處)에 살 때에는 대부분의 생활이 저녁에 집중돼 있었는데, 농부로 살면서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됐다. 신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단순한 삶, 눈 뜨면 밭에 나가서 일하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복된 삶을 농부가 돼서 살게 됐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도를 닦는 것이었는지, 집착했던 수많은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60살이 넘어서야, 여러 가지 깨달음이 왔다.
5월이 되니, 봄 중에 가장 절정이라 온갖 꽃들이 다 피어난다. 귤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덩어리가 된 꽃향기에 취해서 몽롱해진다. 귤꽃 이외에도 지금 뜰에는 꽃들의 축제가 한창이다. 남편 농부는 귤나무를 돌보고, 나는 꽃을 돌보느라 봄날이 날아가고 있다.

2022년도 벌써 1/3이 가버렸으니 나의 하루는 시속 62㎞(62세)로 달리고 있다. 가끔 허무와 무상함이 비집고 들어오려고 할 때 하늘을 바라본다.(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 :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다는 것)

이 찬란한 봄날에 왜 이런 심오한 말이 떠오르는고? 스님들처럼 산중에서 수행하지는 않았어도 삶이 수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관계를 매끄럽게 조화하고, 균형을 맞추며 잘 살아내는 일, 이 나이에도 사람관계는 쉽지는 않음이 내가 많이 모난 사람임을 자각케 한다.

많이 마모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뾰족한 나의 모서리가 꽃으로도 다듬어지지가 않는구나. 꽃밭 한가운데서 차를 마시며 지나간 시간들을 반추해 보고, 앞으로 만날 시간들을 가늠해 본다. 그저, 하루하루를 잘 채우며 사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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