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231)

‘역성혁명’으로 국운이 쇄한 고려의 왕권을 거머쥔 이성계는, 1392년 새 왕조 조선을 열고, 새로운 수도가 될 만한 터전 물색에 나섰다.
삼각산 아래 한강 북쪽지역인 서울 종로 일대의 남경(경복궁 북쪽), 신촌지역인 무악, 그리고 풍수상으로 ‘천하의 명당’으로 1순위에 꼽히던 계룡산이 최종 후보군에 올랐다.

이중 계룡산이 1순위였으나, 개경에서 너무 남쪽에 떨어져 있고, 풍수지리상 길하지 않다는 주장이 거셌다. 지금의 신촌 연세대 일대인 무악은 터가 좁다는 이유로 조정 대신들이 극구 반대했다. 결국은 삼각산 아래의 종로로 낙점됐다.

상왕 태조 이성계의 의지도 확고했다. 한양은 그렇게 조선의 수도로 정해졌고, 빠르게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이때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1342~1398)은 “나라가 잘 다스려 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 달려있는 것이지 자리(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궐 중신들의 풍수설에 의한 천도 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 한양 천도가 최종 결정된 건, 조선조 제3대 태종(이방원) 때인 1404년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때 태종은 한양 천도가 아버지 이성계의 확고한 의지도 있었지만, 풍수지리설을 앞세운 조정 대신들의 무악 천도와 개경 수도 유지 주장을 잠재우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1404년 10월, 종묘 앞에 조정 대신들과 종친들을 모아놓고 “종묘 안에 들어가 도읍지 후보인 송도(개경), 한양, 무악의 세 곳 중 한 곳을 가려뽑기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미리 준비한 쟁반 위에 돈을 던지는 일종의 ‘돈점’을 치게 했다. 결과는 한양 낙착이었다. 태종은 즉각 ‘한양 천도가 하늘의 뜻임’을 선포하고,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 한양 천도와 더불어 조선 법궁으로 출발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에 의해 중건됐다. 이때 창덕궁의 후원 ‘춘당대’와 같은 별궁을 짓고, ‘경무대’란 이름의 후원을 조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경무대 땅에 조선을 통치하는 총독 관저가 들어섰고, 해방 후인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옛 총독관저 이름이었던 ‘경무대’를 대통령 관저 이름으로 그대로 살려 썼다. ‘청와대’란 이름은 1960년 12월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 사용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논의가 분분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구중궁궐’같던 청와대가 개방된다면, 경복궁 창건 이후 6백여 년간 지속돼 온 ‘광화문 권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