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63)

"냉장고를 채우지 말고
텃밭 채우며 미니멀라이프로
여유롭게 살아야지~~"

23년을 함께 한 냉장고가 멈췄다. 지인이 쓰다가 큰 것으로 바꾸면서 물려받은, 신혼 때부터 쓰던 중고냉장고 다음으로 새것으로 들였던 냉장고였다. 30년 된 헌 빌라에 살다가 재건축돼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 큰시누이가 선물로 사줬던 냉장고였는데, 1998년도 당시에는 디자인도 멋스럽고, 적당히 크고, 폼 나는 냉장고였다. 그동안 가족 건강을 지켜준 탱크같이 튼튼한 냉장고가 멈추니, <조침문>처럼 나도 냉장고를 애도하며 추모사를 써야하나 싶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지닌 지 우금 이십삼 년이라. 심신(心神)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조침문 中>

냉장고가 멈춰서 정리하느라 식품들을 꺼내보니, 끝도 없이 나왔다. 냉장고가 어쩌면 질식사한 건 아닐까싶게 가득 채워 넣은 식품들. 아깝다고, 저장한다고, 언젠가는 먹겠지 하고 넣어 두었던 음식들. 심지어 1년 전 것도 저장돼 있었다.
냉동실에는 콩, 팥, 미숫가루, 쌀가루, 들깨가루, 생강가루, 고춧가루, 잣, 떡, 구기자, 말린 생선, 날생선, 멸치, 벌꿀 화분 등등 먹다 남아서 버리기 아깝다고 다음에 먹으려고 넣어둔 자투리 음식 봉지들.

아래 칸 냉장실에도 빈틈이 없게 가득한 통들.(실제로 먹으려고 보면 먹을 만한 것도 없다) 김치와 장류들이야 수시로 먹는 것들이었지만 철마다 담가둔 장아찌는 잘 먹지도 않는데 아깝다고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버리지는 않고, 채우기만 하는 나의 가난한 습관이 빚은 대참사. 스스로에게 아연실색했다.

변명이긴 하지만, 나의 살림살이가 엉망이 된 것은 농부가 되고부터 피곤해서 치우는 것을 미루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방전돼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간신히 저녁밥만 해먹고, 때로는 설거지도 담가둔 채로 잠들기도 했다. 벽에 기대어 쉬다가 씻지도 않고 잠든 적도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하는 습관이 생겼다. 피곤할 때 즉석식품처럼 냉장고에서 꺼내 간편 조리하는 게 편해서였다. 냉장고의 기능이 신선식품 보관이 아니라 창고가 돼버렸다. 그동안 알뜰한 나를 자화자찬 했었는데, 적절히 버리지 못하고, 채우기만 한 습관은 미덕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냉장고 없이 살았었는데, 병원 한 번 안가고 우리가 어떻게 건강하게 자랐을까? 냉장고가 생기고 나서 병이 급속도로 많이 생겼다고 한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이지만 맹신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나는 냉장고를 사지 않고 있다. 바로 해서 먹을 것만 먹고, 저장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냉장고 사는 것을 미루고 있다. 사더라도 아주 작은 것을 살까 한다. 대신에 텃밭마트를 좀 더 다양하게 가꿔서 냉장고에 저장하지 않은 신선음식을 섭취하려고 한다.
농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텃밭마트인걸! 냉장고를 채우지 말고, 텃밭을 채우고, 미니멀 라이프로 여유롭게 살아야지. 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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