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상식- 자장면

■  생활상식- 자장면 

중국의 ‘볶음 면’이 한국인의 입맛으로 재탄생
한국인, 하루에 자장면 600만 그릇 소비

 

자장면 한 그릇에는 국민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다. 한 세기를 함께 해온 자장면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매 끼니를 걱정하던 시기, 아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음식이었고 어른들에게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든든한 먹을거리였다.
이젠 중국 사람보다 한국인이 더 좋아하는 자장면. 이는 더 이상 한 가지 재료와 맛에 국한 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세월과 함께 변화해 왔다. 단순히 한 끼 식사를 채우기 위한 대체용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가 서려있는 자장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장면(炸醬麵)에서 자장면까지

빛나는 졸업장을 받는 날, 이날이 되면 으레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던 자장면. 지금은 스파게티, 피자, 통닭 등에게 최고의 간식 자리를 내주었지만, 어릴 적 입가 가득 춘장을 묻히고 먹었던 쫄깃하고 달콤한 자장면의 맛을 잊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장면의 원조는 중국이지만 한국에 들어온 후 한국인의 맛과 기호에 맞게 변화되어 지금은 한국음식으로 보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자장면은 ‘장을 볶았다’는 뜻의 작장면(炸醬麵)에서 유래됐으며 원래 중국 하류층이 먹던 음식이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중국 산동지방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고국에서 처럼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야식으로 즐겨먹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자장면이 만들어지게 된 시초다. 그러던 중 인천 차이나타운이 조성됨과 동시에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자신들이 즐겨먹던 이 음식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자장면가게 ‘공화춘’(共和春)
자장면이 본격적으로 사랑받게 된 건 1945년 해방 후였다. 해방 후 나라에서 중국 상인들의 무역을 금지 시켰고, 수입을 잃은 중국 상인들은 그들의 지방에서 먹고 생활하던 음식을 바탕으로 음식점을 차렸다. 중국음식점 숫자는 순식간에 늘어났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개발하던 중국인들은 한국의 농산물을 이용해 춘장을 섞어 자장면을 만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자장면을 처음 만들어 판 집은 1905년 제물포에서 문을 열었던 공화춘(共和春)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문화재 246호로 등록 돼있는 공화춘(共和春)은 자장면을 한국사람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는 한국의 ‘전통음식’으로 만든 계기가 된 음식점이다.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지만 일제 때부터 청요리로 크게 이름을 날렸던 고급 요리 집이었다.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 유지들은 인근의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를 개업, 차이나타운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희노애락의 산 증인 ‘자장면’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장면을 속칭하는 ‘짱깨’란 말은 ‘장궤(掌櫃)’라는 중국말에서 유래되었다. 장궤는 ‘주인장, 사장’을 뜻하는 말이고, 흔히 중화요리점에서 중국인들끼리 “사장, 나 왔어”라며 인사할 때 들리는 ‘장궤’라는 단어를 한국말로 ‘짱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양세욱(37) 한양대 연구교수는 “자장면은 우리네 희로애락의 산증인이자, 한·중 교류의 가교였다.”고 말한다. 최근 ‘짜장면뎐(傳)’을 펴낸 그는 1950년대부터 한국의 외식문화를 점령해 온 자장면을 통해 한·중 음식문화와 교류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현재 한국인이 하루에 먹는 자장면은 600만 그릇 정도. 기록상 15원(60년대 초)하던 최초의 자장면 가격은 현재 20배가 넘었지만 하루에도 600만 그릇 이상이 나갈 정도로 그 맛과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양세욱 교수는 “자장면은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산업화의 ‘전투 식량’이자, 우리네 희로애락의 산증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자장면에 따뜻한 박수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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