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씨의 추억은 방울방울(마지막회)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또다시 봄인데 말이다"

외풍에 코 매워 잠에서 일찍 깬 시린 새벽,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첫 장을 읽는다. 담요를 목까지 두르고 가만 보니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다. ‘빛이 있으라’는 소리에 혼돈과 암흑 속에서 빛이 생겨났고, 빛과 어둠을 나눠 두셨다. 그리고 나서 하늘을, 땅과 바다를, 그 다음에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그러고 보니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태양 빛은 나중에 만든 것이고, 근원적인 빛이라는 에너지가 먼저 있었던 셈이다.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만드신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성질인 빛은 행복, 기쁨, 깨달음, 공감, 소통. 아름다움, 생명과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어둠은 고통과 슬픔, 고립과 단절, 아픔과 이별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만물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나름 해석이 된다. 

내 안에 양과 염소가 함께 있고, 알곡과 가라지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속에도 이 빛과 어둠이 항상 공존하나 보다. 자기 내면의 원천을 깨닫고 보니 나를 누르던 강박이 벗겨지고, 조였던 나사가 풀어지는 자유로움이 몰려온다. 한 줄의 깨달음으로 사방으로 눈이 뜨이며 무릎을 친다. 새롭게 자신을 발견한 기쁨은 내 안에 푸른 바다로 출렁이고 있다.

새벽이 푸른 등으로 숲을 켠다. 나뭇가지 사이에 낀 어둠이 뿔뿔이 흩어지고 하늘은 점점 해상도를 높인다. 뒷산에서 바람을 타고 마을로 내려오는 그 소리는 어느 나뭇가지에 앉았을까?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저귀는 소리만 생생하고 경쾌하다. 

장날이라 오랜만에 장보러 간다. 코로나19 이전보단 덜하지만 장날 시장은 여전히 사람 사는 냄새로 북적인다. 옷가게, 떡집, 어물전을 지나 먹자골목엔 김이 물씬물씬 오르는 어묵탕, 떡볶이, 호떡가게 앞을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섰고, 순대, 족발가게도 만석이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무리지어 먹고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어깨를 비비며 걷는다. 

사거리를 건너 끝집이 시골통닭집이다. 커다란 가마솥 설설 끓는 기름에 막 튀겨 쏟아내는 노릇노릇한 닭다리, 서비스가 좋은 사장아줌마의 날렵한 손길을 보며 나는 긴 줄 사이에 껴 있다. 엄동설한 노상에서도 자기 일에 노하우와 자부심이 묻어나는 “다리 하나 더 넣었어요~”라는 그 구수한 목소리에 바라보는 눈길들의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나를 통닭집에 줄 세운 남편은 그새 포항에서 올라온 과메기와 미역 한 줄을 사왔다. 살아 숨 쉬고 사람 얘기가 넘실대고 끈끈한 정이 밧줄처럼 질긴 농촌의 오일장은 이제 그 어디서도 대신할 수 없다.

서울서 시골로 내려올 때는 어서어서 세월이 흘러 나이 들기를 바랐다. 세상의 모든 모퉁이를 돌고 돌아서 들숨날숨 고루 쉴 수 있는 지금이 참으로 감사하다. 나와 비슷한 이 세상의 모든 황혼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전한다. 

마을 이장님의 방송이 시작됐다. “상토를 주문할 사람은 오늘 내로 연락을 주세요~” 벌써 새해 농사가 시작되나 보다. 
그대가 지쳐 쓰러졌더라도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또다시 봄인데 말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을...

 

(그동안 ‘귀농아지매 장정해의 추억은 방울방울’ 코너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도시주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농업·농촌·농식품 이야기 ‘도시주부 이여사의 농담식담’을 연재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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