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47)

겨울의 치열한 24시간을 전하면 
결코 낭만이 아닌,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알게 될 것...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관광섬 제주도에서 귤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부분이 너무 부럽다는 말이 나온다. 육지의 산골오지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고생스러운 시골살이를 떠올리면서도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심지어 로망이란다. 나도 제주도에 남편 발령 따라 와보니 겨울 제주도가 너무 아름다워서 뭣도 모르고 농부의 길로 들어섰으니,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겨울 제주도는 남한 최고봉 한라산이 하얀 눈을 겨우 내내 이고 있는데, 아랫녘 서귀포에서는 초록귤나무에 주황색 귤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그 아래에는 제비꽃, 양지꽃, 민들레가 피어있어서 겨울인지 봄인지 싶다. 온 사방이 귤꽃(귤)이 피어있고, 화사한 동백꽃까지 축제를 벌이니 겨울 제주는 환상적인 모습이다. 

을씨년스런 겨울 날씨에 웅크리고 살다가 이런 환상적인 남국의 풍경을 보고는 모두가 반해서 제주도 농부조차 낭만농부로 보이는 것이다. 나도 2004년도 5월에 제주도에 왔는데, 겨울을 지나면서 제주도에 반해서 덜컥 귤밭을 사서는 농부의 길로 들어섰으니 나는 로망을 실현한 셈이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낭만농부는 ‘과연 제주도 농부가 낭만농부일까~’하는 환상을 벗겨본다. 사계절 중 겨울의 치열한 하루 24시간을 전하면 결코 낭만이 아닌,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치열한 체험 삶의 현장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겨울과일인 귤은 11월부터 12월까지 따지만 직거래를 택한 나는 1월에도 귤을 딴다. 그래서 거의 3개월을 바깥에서 지내는데, 제주도가 따뜻하다고 해도 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이 많아서  한라산 눈바람이 섞인 겨울바람은 코끝을 겨자보다도 톡 쏜다. 

인부를 동원해 한꺼번에 다 따 내려서 상인이나 거래처에 넘기고 겨울을 편히 나는 귤농부도 있다.그런데 우리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하려면 일정한 수익구조가 돼야 하기에 택한 방식이 직거래라서,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 나무에서 완숙과를 따느라 겨우 내내 몇 차례나 귤밭을 돈다.

귤을 따고, 나르고, 선별하고, 택배포장하고, 택배회사에 실어다주고... 이 모든 과정을 몸으로 해내야 하기에 이맘때는 체력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나와 남편의 배둘레햄(뱃살)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다. 남편은 인간 기중기가 돼서 하루에도 수십 톤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 우리는 둘이서 몸으로 참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이제 일이 그리 두렵지 않고 굳은살이 몸에도 정신에도 박혔다.

나는 낮에는 귤을 따고 밤에는 주소를 정리해 컴퓨터에 입력하고 운송장을 뽑는 일을 하느라 수면부족에 시달린다. 글자 하나가 틀려도 잘못 배송되는지라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해서 이맘때 나는 온 신경이 곤두서있다. 늘어져있던 내 의식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이맘때가 명징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다. 

벌써부터 한라산 눈바람이 휘몰아치는데, 이 겨울이 다 지나고 나면 조용필님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절절히 노래할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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