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남편과 전통주 한 잔 마주하며 
옛이야기 편안하게 나누면서 
흐린 날의 축축한 기운을 즐긴다"

황금들판엔 벼베기가 한창일 텐데, 요즘 들어 왠지 가을비가 자주 온다. 아마도 추워지려고 그러나 보다. 하늘은 회색 점토를 주물럭거린 것 같고, 쌀뜨물을 받아 끓인 뭇국 같은 안개비가 흩뿌려진 풍경은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아 공기 속엔 강물 냄새, 이슬 냄새가 난다. 

비가 그쳤나 창을 내다보며 생각을 툭툭 털고 일어나 현관문을 밀고 집 뒤안으로 나간다. 며칠 전 TV프로 ‘나 혼자 산다’에 배우 곽도원이 출연해 제주도에서 싱글라이프를 즐기는 일상을 리얼하게 보여줬다. 자취생활 20년 노총각의 현란한 살림솜씨는 투박하면서도 정교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그중에 마당에 돌나물을 뜯어 초장을 뿌려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하려고 나왔다. 

연기에 필요한 승마를 배우러 승마장에 간 곽도원이 마구간에서 생후 한 달도 안 된 망아지와 교감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순간 제주도에서 기억이 떠올랐다.
25년 전쯤인가. 친정엄마의 환갑을 맞아 동생가족과 우리가족 모두 9명이 제주도로 2박3일 여행을 할 때 일이다. 아이들 4명 모두 떠날 때부터 말타기를 원해서 이튿날 우리는 일찍 승마장에 갔다. 엄마와 남편과 나를 빼고 동생 내외와 아이들 모두 말을 골라 탔다. 조련사 한 사람이 복판에 서서 사람을 태운 말의 고삐를 양쪽으로 잡고 천천히 걸어 승마장 트랙을 크게 한 바퀴 돌아오는 거였다. 그런데 말이 한 필이 남아있다고 한 사람 더 타라고 권했다. 남편과 엄마는 절대 안 탄다고 선언을 했고, 조련사는 만만한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승마용 부츠를 신고 모자를 쓰고 조끼까지 입고 조련사 손에 의지해 말에 올라타고 보니 그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밑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안장 밑에서 느껴지는 말의 등근육의 씰룩거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동차를 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높이에서 오는 확 트인 시야, 그저 말안장에 붙어 있는 둥근 손잡이 외에 내가 붙들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직 조련사가 말고삐를 잡아 말을 안전하게 끌고 가는 것인데도 나는 좀 무서웠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내가 탄 말이 그 자리에서 꼼짝을 안 하는 것이다. 앞서 출발한 팀은 벌써 멀리 나갔던 터라 조련사도 맘이 바쁜지 말고삐를 당겼다 늦췄다를 반복하고, 풀을 꺾어 입에 대보고 별짓을 다해도 꼼짝을 안 한다. 

나는 그만 내리겠다고 했다. 내가 말타기에는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서인가 무안하기도 하고 자책감도 들어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조련사가 말고삐를 잠시 놓고 돌아선 순간 꼼짝 않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말은 앞서 출발한 말을 이미 추월해 승마장 트랙을 벗어나 쏜살같이 달렸다. 내 몸은 안장 위에서 말이 달리는 대로 점프를 했다. 사극의 한 장면이랄까, 서부극의 한 장면이랄까...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처럼 엄마 회갑연을 맞아 가족여행을 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거나 죽거나 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때 전심을 다해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제 이렇게 급한 기도는 다시 드리지 않을게요. 하나님, 제발 이 말을 붙잡아주세요. 멈추게 해주세요. 말에서 내리게 해주세요.” 얼마나 안장고리를 붙들고 달렸는지 모른다. 궤도를 벗어나 달리는 말을 좇아 승마장 조련사들이 말을 달려와 달리는 말고삐를 잡아 말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가도록 유도했다. 

말에서 내리면서 두 다리가 후들거려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승마장 대표의 말로는 그 말이 경주용 말인데,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랬노라고 백배사죄를 드린다며 용서를 구했다. 철없는 얘들은 “엄마 언제 그렇게 말을 탔어? 멋있었어~ 너무 잘 타던데~~”
나는 가랑비를 맞으며 부추 한주먹과 돌나물을 조금 뜯어 와 남편이 좋아하는 전을 부친다. 남편과 전통주 한 잔 마주하며 옛이야기 편안하게 나누면서 흐린 날의 축축한 기운도 즐기며 오늘 하루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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