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한국 대중가요의 산 역사’인 가수 이미자(李美子·69)가 올해로 데뷔50주년을 맞아 노래인생 50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4월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갖는다.
해방 전 서울에서 태어나 6·25를 전후해서 매우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내고, 한때 피난시절에는 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그는, 문성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8년 <열아홉 순정>을 취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데뷔곡 <열아홉 순정>과 50년대 말 <님이라 부르리까>가 크게 히트하면서 장래 유망한 신인으로 부상했다.

그후 불후의 대표 히트곡이 된 <동백아가씨>와 <울어라 열풍아><여자의 일생><모정><섬마을 선생님><유달산아 말해다오><흑산도 아가씨><기러기 아빠><서울이여 안녕><아씨>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트로트계 최고의 왕좌를 차지했다.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문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자 그 아성이 잠시 흔들리면서 블루스, 맘보, 부기우기, 탱고, 트위스트 같은 새로운 형식의 서양음악에 잠식당하기도 하지만, 숙명적인 한과 눈물의 정서로 요약되는 그의 노래정서는 우리 국민들의 감수성 깊숙이 자리해 변함없이 심금을 울렸다.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는 가늘고 곱고 맑은 그의 목소리와 탁월한 가창력은, 당대 사회상황의 커다란 변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최고 인기가수의 자리에 굳건하게 앉혀놓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시절, 한때 그의 노래들이 일본가요인 엔카풍이라는 왜색성 시비에 휘말려 최고 히트곡인 <동백아가씨>가 금지곡 처분을 받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50주년을 맞으면서 한 그의 말처럼 ‘촌스러운 모습’ 그대로 그는 건재를 과시했다.

또 1989년 10월, ‘이미자 노래 30년 기념공연’을 놓고 트로트 가수에게 세종문화회관 대관을 허가 하느냐 마느냐 하며 시비가 일어 당시 세종문화회관 자문위원이자 원로 음악인인 음악평론가 박용구, 가곡작곡가 김성태 등이 항의표시로 사퇴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대관허가가 나 성황리에 공연을 하게 됐고, 이 자리에는 여야4당의 거물들인 김영삼·김대중·김종필·박준규 씨 등이 참석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인기를 실감케 해주었다.
얼마 전, 한 TV의 장기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인 며느리가 일본 친정부모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시집와 세 아이를 낳고, 말도 안 통하는 시부모 모시고 살면서 겪은 애환과 가슴에 꽁꽁 저며둔 한을 <동백아가씨>에 녹여 불러 방청객과 시청자들의 가슴을 짠하게 울렸다.
이 일본인 며느리 말고도 지금 우리 농촌의 다문화 가정에서는 많은 ‘동백아가씨’들이 설움에 겨워 그녀처럼 밤마다 소리죽여 울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남도엔 동백꽃이 한창이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가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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