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나는 맘을 바꿔먹기로 했다. 
시간을 쓴다는 마음보다 
시간을 저금한다는 마음으로..."

“맘~ 이번에 며칠 일찍 내려가면 어떨까? 엄마 병원 가는 날이 언제지?” 
딸은 손주녀석 태권도 방학하는 때를 맞춰 괴산(친정)에 내려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시간을 당기고 싶어 했다. 나는 시간을 미뤄도 되고 당겨도 되니까 너희 좋을 때에 내려오라고 했다. 
“도후한테 더 많은 시간을 저금해주고 싶어서...” 딸은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바람을 ‘시간 저금’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계획을 배려하면서도 의미 있게 여겨주는 맘이 근사하고 괜찮았다. 

일곱 살이 된 손주녀석은 서울에서 사는 도시생활도 즐기지만, 시골에서의 무한정 풍요로운 자연과 저를 최우선으로 봐주는 사랑과 자유를 맛 본 녀석은 손꼽아 시골 괴산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를 조른다는 것이다. 

손주는 올 들어 봄부터 부쩍 자주 내려왔다. 서울에선 해보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과 놀이를 하면서 우리를 제 부모보다 더 따르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와 강가 낚시터에 내려가선 혼자 진흙으로 성도 쌓고 물길을 만들어 흘려보내고, 곤충들이 부화하고 난 껍질을 모으고, 돌멩이를 줍고, 할아버지가 잡아 올린 물고기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두 손으로 잡아 삐꾸(고기 담는 가방)에 넣고 개선장군인양 돌아온다.

한글도 터득하고 말귀도 트여 손주녀석은 제 스스로 놀잇감을 잘 찾아 논다. 지난번에는 앨범을 보여 달라고 해서 제 엄마와 이모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저녁 내내 재미있어 하더니 이번에 내려와선 먼지 쌓인 묵은 박스를 찾아서 제 엄마와 이모의 초등학교 일기장을 꺼내 읽는다. 

손주녀석은 내게 일기장을 읽어달라고 가져왔다. 나도 새삼 딸의 어린 시절 일기를 읽으며 그때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 났다. 손주녀석은 어린 시절의 엄마를 읽으며 깔깔깔 넘어가기도 하고, 내 이해가 곁들인 일기 읽기에 빠져들어 “그래서, 그 다음은~ 다음은~ 또 어떻게 됐어?” 하며 제 엄마가 이제 자야한다고 부를 때까지 밤이 늦도록 내 곁에서 떠나질 않는다. 읽다보니 손주녀석은 어느새 내 팔을 베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도후야, 너도 이모나 엄마처럼 일기를 써 놓으면 나중에 이렇게 그때를 다시 꺼내볼 수 있어. 시간을 저금하는 것이 되거든.” 그러면서 나도 내게 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되물어 본다. 농원에서 날마다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며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헛되이 쓸까 조바심 내면서 그 쓸모와 가치를 계산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돈이 되는 일에, 책임질 일에 우선권을 주는 게 시간을 아끼는 일이라 여겼다. 어쩌면 삶이 바쁘고 초조했던 것은 시간이란 돈처럼 써버리는 것,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는 것, 안개처럼 금세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 번쯤 시간이란 모으는 것, 누리는 것, 간직하는 것이라고 바꿔 생각하면 어땠을까. 나는 맘을 바꿔먹기로 했다. 시간을 쓴다는 마음보다 시간을 저금한다는 마음으로.

9월이 밀물처럼 밀려와 창 하나를 맑게 닦아놓았다. 강 건너 벚나무 가로수가 벌써 발그레하게 단풍이 들고, 청명한 가을바람은 헝클어진 먹구름을 밀치고 푸른 공간을 열고 있다. 뜰 앞마당엔 우리 도후가 좋아하는 제비나비, 호랑나비, 호박벌이 방아꽃 사이에 시끌벅적하게 난다. 

딸이 이번 달엔 아무래도 추석을 넘겨 내려가야 엄마가 덜 번거롭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언제와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남편은 벌써 손주의 관심사인 커다란 말벌집을 떼어다 놓고, 곤충들이 눈에 띄는 대로 사육통에 모은다. 손주의 수준과 딱 맞는 남편을 보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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