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36)

내가 살길은 근무조건을
하나씩 고쳐가는 것.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성 상위시대는 아니지만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다방면에서 남성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어떤 직업은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쟁력에서 여성이 우위인 분야도 많아졌다. 육체적인 힘을 많이 써야하는 농업분야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우위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생산의 비중보다 판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여성의 섬세함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 전 전문직으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하던 커리어우먼이었던 내가, 결혼과 함께 육아의 어려움에 봉착해서 어쩔 수없이 직장을 도중하차했다. 세 아이 육아에 매달려 전업주부로 산 세월동안 사회적인 경력단절로 나는 경쟁력을 잃은 무능함에 자책을 했었다. 전업주부도 전문직이고, 육아도 전문직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하고, 사회생활에서 쌓은 경력과 경쟁력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아쉬움에 한동안 방황했었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자체가 그 무엇이든 전문직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는데, 농부가 되고나서야 생계를 위해 매진해야 했던 일 속에서 나는 다시 나의 존재감을 되찾았다. 일을 통해서 자아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것이든 취미이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성취감과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 그것은 살아있음의 역동감을 느끼게 했다.

남편의 명퇴로 얼떨결에 생계마라톤의 주자가 됐는데, 열악한 가내수공업의 근무조건은 수면시간을 빼고는 무제한 일하는 상황이 됐다. 남편이 회사 다닐 때는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을 집에서는 왕처럼 쉬게 해줬는데, 내가 주자가 됐는데도 육아에 살림살이에 일까지 더하니 이런 불편부당한 근무조건하에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정경제는 축소된 사회경제이고, 국가경제의 근간인데, 생산의 주체인 나는 가장 열악한 근무조건에 놓였던 것이다.

내가 살길은 근무조건을 하나씩 고쳐가는 것.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남편과 24시간 함께하는 동업자인데, 하루세끼를 다 내가 책임지면 일은 누가 하노? ‘아침은 간단하게, 점심은 각자 사먹기... 저녁은 성찬을 차려준다’로 정했다. 남편은 투덜댔지만 내가 돼지사육사는 아니잖은가?

“나는 당당한 여성 농부다! 전문직 커리어우먼이다.” 다시 치열한 경쟁사회로 진입한 나는 생산도 하고, 판매도 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했는데, 고루한 남편은 아내 역할만 강조했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을 아마도 농촌여성이면 다 느낄 것이다. 일보다도, 남편이 가장 큰 난제라는 것을. 그 난적과 마주하고 담판을 짓고, 나의 역할을 구분 짓고, 매듭을 풀어나가지 않으면 나의 평생직장은 성취의 장이 아니라 고통의 굴레가 된다는 것을.

17년의 농부생활을 이어 올 수 있었고, 이제는 내가 원하는 근무조건을 만든 것은 남편과의 지난한 협상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점심시간에도 각자 취향에 따라서 혼밥(혼자 밥먹기)을 먹는데, 우리는 여느 직장인처럼 맛있는 식당을 찾아서 즐기면서 먹는다. 여자는 남이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다. 가끔 나는 카페에 가서 즐기기도 하고, 지인과 노닥거리기도 한다.
쉼과 노동을 적절히 안배해야 오래 갈 수 있다. 이제야 “농부가 최고 직업이야~” 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농부예찬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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