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철
농학박사
본지 칼럼니스트

 

그곳에는 자동차 진입제한구역이 있다. 함부로 새 건물을 짓지 못하고, 가능하면 오래된 건물은 고쳐 쓴다. 가정에서는 작은 냉장고를 사용한다. 주변에서 생산된 신선한 채소나 고기가 가까운 데서 즉시 공급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패스트푸드 등 인스턴트 음식이 없다.
전통이 살아 있는 도시, 빠른 삶을 상징하는 음식이 없는 도시, 바로 ‘느리게 살자’는 슬로시티(slow city)이다. ‘슬로시티’란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이는 미국 패스트푸드에 기초한 패스트 라이프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정신을 지역 차원으로 확대한 개념이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슬로시티’가 선언됐다.
우리나라는 2007년 전남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장평면, 담양군 창평면 등 4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받았다.
증도는 해수욕장과 염전 등 천혜 자연조건을 갖춘 자전거 섬이다. 청산도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민속가옥, 해녀 등 섬 특유의 민속 문화와 독특한 농경·어로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특히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장흥군 장평면은 표고버섯을 지역농산물 브랜드로, 버려지는 표고 자목을 활용해 장수풍뎅이마을(유치면)을 만들었다. 창평면은 전통적으로 죽부인 대자리 등 죽세공품과 죽염된장, 한과, 쌀엿 등 전통음식을 생산해왔다.

‘슬로’는 자연의 순리
‘슬로’는 자연의 순리 ‘슬로시티 운동’을 창안한 이탈리아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는 ‘슬로’라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슬로시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물질본능에서 자연·인간본능으로 회귀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21세기 문화 코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멋진 삶을 촉진할 수 있는 현대와 전통의 조화다.
일반인들은 우리나라의 어느 지방 사람들은 천성이 느린 사람들이라고 농을 하기도 한다. 슬로시티 의미로 해석한다면, 고유한 지역특성을 살리고, 미래를 향하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이성적으로 보는 혜안을 가진,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느림의 미학을 깨닫고 생활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슬로푸드는 음식을 천천히 먹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만들어진 재료로 요리한 음식이다. 느림이란 자신에 대한 존중, 자기 삶의 리듬을 스스로 조절하자는 철학이다. 도시문화에 찌든 일률적 빨리빨리 문화가 아니다.

‘정중동’의 농업·농촌 추구해야
우리나라 농업은 전통적으로 소농에 의한 영농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환경보전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업, 바로 느림의 농업이다. 우리 농업이 추구하는 목표는 서구적 대규모 영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우리 농업·농촌의 가치를 모르고 살았다. 슬로시티 운동을 통해 그런 장점을 살려야 한다. 감소한 농촌인구, 고령화된 농촌사회, 이를 역이용하여야 한다. 녹색관광을 자원화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어가자.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집에서 태어난 파올로 사투르니니는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이다.
평소 이메일도 잘 쓰지 않고,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천성이 느긋하지만 ‘슬로시티’ 정책을 도입한 뒤에는 더욱 바쁘게 지냈다. 시간이 마음의 속도로 흐른다. 정중동(靜中動), 이것이 바로 슬로시티, 우리농업·농촌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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