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시인·가천대 독서코칭과정 책임교수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패거리 심리인 편협에서 벗어나야...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악한 사상이 아니다.
그동안 인정받지 못한 여성이
봇물 터지듯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을
혐오현상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세계가 혐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대한민국도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한 갈등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상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취향이나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과한 공격을 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이번에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안산 선수의 페미니즘 논란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페미니즘 성향을 가진 것이 마치 범죄인 양 사람을 과도하게 코너로 모는 행동이야말로 집단주의 또는 패거리주의 발상이다.
스마트폰과 사회적 테크놀로지가 극도로 발달하면서 패거리 심리의 조작은 훨씬 더 쉬워졌다. 즉 플랫폼이 등장해 양극화가 심화됐으며, 각 진영의 문턱이 높아지고 골이 깊어지고 있다. 캐버너는 인간의 삶을 집단주의적 성향과 개인주의적 성향의 긴장 관계로 풀이한다. 여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은 이기적 행위와 등식화된 상태에 가깝다. 즉 책임은 지지 않으며 무책임한 말을 양산하는 개인주의가 팽창하고 있다. 사실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하며 항상 조직의 장래와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조직 속에서 개인은 항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부분이 전체의 합인가? 무책임한 개인(부분)의 합은 전체(조직)보다 작지만, 책임을 다하는 개인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면서 개인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집단에서 어떤 ‘지표적 징후’가 발생하면 그 증상이 전염되고, 집단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여러 병증이 나타난다. 이러한 병증에 동조하는 것은 인간에게 흔히 일어나는 편협한 사회현상이다. 이를 ‘패거리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패거리는 옳고 그름을 뛰어넘어 패거리의 힘을 발휘한다. 이로써 개인의 힘이 극대화되고 집단행동이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전도 양상이 나타나 패거리 문화는 패거리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에서 벗어나더라도 묵인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안산 선수의 페미니즘 논란이다.
이런 위험은 개인들의 디지털 독점, 사생활에 대한 위협, 알고리즘의 조작, 사회 불평등의 확산, 가짜 정보의 확산, 조직적인 괴롭힘 등이 특징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그러한 조작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다. 이는 흔히 익명성으로 대표되는 한계와 가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좀비는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다. 차별도 이와 같아서 인간처럼 비슷하게 생겼으나 의식과 분별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허용된 권리와 기회를 동등하게 향유할 자격이 주어지면 안 된다고 여긴다. 따라서 좀비에게 하듯이 여성에게 총알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와 안티페미니즘 정서는 편협한 집단행동이며, 집단종교에서 보이는 마녀사냥을 닮았다. 파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의 위치가 무엇보다 중요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극단적인 생각은 극단적인 행동을 낳는다.
만연한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패거리 심리인 편협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악한 사상이 아니다. 그동안 인정받지 못한 여성이 봇물 터지듯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혐오현상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또한 여성, 남성, 사회를 혐오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의견을 표출할 때 지혜롭고 지극한 배려가 서로 필요한 때다.